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비둘기파(통화 완화 선호)로 돌아선 까닭은 글로벌 경제의 경기 침체(recession) 공포를 선제적으로 잠재우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나온다. 연준이 지난달 30일(현지 시간) 발표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성명에는 ‘인내심’이라는 단어가 4년여 만에 등장했다.
이날 연준의 발표에 따라 한국을 비롯한 신흥국 경제에는 일단 숨통이 트이게 됐다. 하지만 연준이 금리 인상을 중단할 정도로 실물경기가 급격히 둔화되고 있음을 반영했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 미국의 긴축, 3년 만에 끝나나
미 연준의 돈줄 죄기는 2015년 12월 시작됐다. 2008년 12월부터 유지된 ‘제로금리(0.00∼0.25%)’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었다. 지난 3년간 연준이 양적완화 규모를 줄이고 정책금리를 잇달아 올리면서 남미 등 신흥국의 통화 가치가 급락하고 외국인 자금이 이탈하는 등 시장 불안이 여러 차례 나타났다.
그런 연준의 태도는 작년 말부터 달라졌다. 지난해 12월 FOMC 위원들의 금리전망표(일명 점도표)를 보면 2019년 금리 인상 횟수 예상 중간값은 직전의 3회에서 2회로 낮아졌다. 지금은 이 ‘2차례 금리 인상’마저 현실화되지 않을 공산이 크다. 미중 무역전쟁과 자국 내 경기 하강 등 악재가 겹치면서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계속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준은 “(향후 금리 정책은) 전적으로 경제 지표에 의존할 것”이라며 이런 경제 상황을 유심히 지켜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연준은 금리 인상을 당분간 중단하는 동시에 현재 진행하고 있는 ‘보유자산 축소’도 속도를 늦출 수 있다고 밝혔다. 연준은 만기가 돌아오는 채권을 다시 매입하지 않는 방식으로 보유 자산을 줄이고 있는데 이 속도를 조절해 긴축 속도를 완화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연준 결정의 배경에는 미중 무역분쟁으로 인한 경기 둔화 움직임과 영국의 노딜(No deal) 브렉시트(합의 없이 영국이 EU를 탈퇴)에 대한 우려 등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깔려 있다. 이를 반영해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세계 성장률을 3.7%에서 3.5%로 낮췄다. 미국 경제 자체도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12월 고용 지표는 호조세를 보였지만 주택 거래량은 줄어들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경제 전문가 5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올해 1분기(1∼3월) 미국 성장률은 1.8%로 지난해 3분기(7∼9월, 3.4%)에 견줘 크게 떨어질 것으로 예상됐다. 연준은 이날 미국 경제성장세에 대한 표현을 지난해 12월 ‘강한(strong)’에서 ‘견고한(solid)’으로 변경했다.
○ 한은은 일단 한숨 돌려
미국이 금리를 올릴 때마다 외국인 자본 유출 가능성을 우려해야 하는 한은은 통화정책 운용에 부담을 덜게 됐다. 현재 한국의 기준금리는 1.75%로 미국보다 0.75%포인트 낮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금리 인상 속도가 늦어지거나 중단되면 등 떠밀리듯 기준금리를 올려야 하는 부담을 질 필요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31일 기자들과 만나 “연준 결정이 시장 생각보다 더 완화적이었다. 시장 안정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했다.
연준의 결정은 한국을 포함한 신흥국 자본시장에도 호재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달러 강세에 브레이크가 걸리며 위험자산 선호 기조가 확산돼 신흥국에 자금이 유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연준의 결정으로 글로벌 시장에 달러 유동성이 유지되는 효과가 나타나 한국 및 신흥국에 투자하려는 수요가 증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닛케이평균주가는 1.06%, 상하이종합지수는 0.35%, 홍콩 항셍지수는 1.08% 오르는 등 아시아 각국 지수가 상승세를 보였다. 코스피는 0.06% 빠졌고, 코스닥지수는 0.22% 올랐다.
이번 연준의 결정으로 세계 경제의 큰 리스크 중 하나가 해소됐지만 아직 불씨는 남아 있다. 30, 31일(현지 시간) 열리는 미중 고위급 협상은 첫날 접점을 찾지 못하고 마무리됐다. 중국의 지식재산권 도용, 중국에 진출하는 미국 기업에 대한 기술 이전 강요 등 주요 쟁점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월 29일로 예정돼 있는 영국의 브렉시트 시한도 점점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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