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면, 기억은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이다. … 전후 세대에게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 또 물어서도 안 되지만, ‘기억 연구’라는 영매를 통해 과거의 비극과 만나고 죽은 자들과 소통하고 기억해야 하는 책임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읽은 뒤 좀 후회했다. 명쾌한 문장 덕에 배운 게 많지만, 머리도 가슴도 뻑뻑해졌다. ‘역사에 대한 기억’이 이다지도 복잡한 일일 줄이야. 자칫 양비론이나 양시론에 휘둘리고픈 유혹마저 느껴졌다.
일단 감 놔라 배 놔라 하기 쉬운 남의 일부터 짚어 보자. “베일 뒤에 숨은 가해자”였던 오스트리아. 알다시피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나치에 가장 적극적으로 동조했던 국가였다. 당시 ‘제3제국’ 전체 인구 가운데 오스트리아인은 8% 정도였지만 나치 친위대의 14%나 차지했을 정도다. 하지만 그들은 전후 스스로를 나치의 첫 번째 피해국이라 불러왔다. 히틀러의 서슬에 휘둘린 불가항력적 가담자일 뿐이라는 논리다. 2013년 여론조사에서도 응답자의 61%가 ‘과거 청산은 지금으로도 충분하다’고, 46%는 ‘오스트리아는 나치의 희생자’라고 답했다고 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일본이 자행하는 ‘기억 조작’은 더하다. 우리를 비롯해 아시아를 사지로 몰아넣은 제국주의 주범이 가녀린 원폭의 피해자인 양 행세한다. 위안부 문제는 군이나 정부가 이를 지시했다는 증거나 문서는 어디에도 없다는 얄팍한 ‘실증주의’를 들이민다. 특히 “많은 일본인이 자신은 군부 지도자들에게 속은 순진한 보통 사람일 뿐이며, 오히려 희생자”라고 생각했다.
속에서 천불이 날 얘기지만, 저자는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도 냉정히 들여다볼 것을 주문한다. 사례로 든 ‘집합적 유죄’란 개념이 그렇다. 해나 아렌트는 단지 독일인이란 이유로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고 항변했다. 만약 전후 일본이 똑같은 논리로 일제의 만행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 더. 그렇다면 한국군이 베트남전쟁에서 벌인 행위에 대해서는 현재의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물론 사안마다 경중이 다르며 ‘침묵’과 ‘부정’과 ‘왜곡’은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하지만 이 기억 전쟁의 면죄부를 ‘내로남불’로 선택할 순 없는 노릇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해결의 실마리는 과거에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과 그 과거를 기억할 책임을 구분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이성적으로나 감성적으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결국 하나씩 풀어나갈 수밖에 없으리라.
‘기억 전쟁’은 몹시 날카롭고 매섭다. 역사를 자기 입맛대로 재단하려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 암세포는 우리 사회, 우리 인식 속에서도 살아서 꿈틀거린다. 어떤 수술이나 약물이 효과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넋 놓고 있다간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암을 앎으로써 다시 한번 출발점에 서야 한다. 지난한 싸움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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