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신료인 후추에 대한 열망이 의도치 않은 지리상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모피에 대한 열망은 미국과 러시아가 대국이 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작은 움직임이 큰 사건을 일으킨다. 천정부지로 치솟던 모피, 후추 가격이 나비의 날갯짓이었다
브라질 밀림에 사는 나비의 작은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를 타격하는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게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다.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작은 움직임 하나가 후일 큰 사건을 일으킬 수 있다. 인류 역사의 전환점이 된 지리상의 발견(Geographical Discoveries)과 이로 인한 서양의 득세 과정에서도 나비 효과가 나타난 적이 있다. 나비의 날갯짓 한 번에 해당하는 움직임은 천정부지로 치솟던 후추·모피 가격이었다.
육류를 즐긴 유럽인에게 후추는 식탁의 필수품이었다. 공교롭게도 후추는 유럽에서 생산되지 않았다. 저 멀리 인도에서 전량 수입됐다.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후추 가격은 당연히 비쌀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중간상 노릇을 하던 이슬람 및 이탈리아 상인들이 폭리를 취했기에 유럽 소비자에게 후추는 비싸기 그지없었다.
‘부드러운 금’ 모피, ‘검은 황금’ 후추
모피의 사정도 후추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수달, 비버, 담비 같은 모피동물(Fur Animal)은 계속된 남획으로 인해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절멸됐거나 멸종 위기에 처해 있었다. 모피는 유럽의 추운 겨울을 견디게 해줬으며 신분을 상징하는 수단으로도 활용됐기에 수요가 끊이지 않았다. 사냥꾼들은 ‘부드러운 금’이라고 불리던 모피를 구하고자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후추와 모피 중 ‘나비 효과’의 방아쇠 구실을 먼저 한 것은 후추다. 현대인은 냉장 및 냉동 기술 덕분에 언제든 신선한 고기를 즐길 수 있으나 중세와 근세 유럽인은 그런 축복을 누리지 못했다. 도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고기가 아닌 이상 소금에 절여 먹었다. 고기를 소금에 절이더라도 오래 보관하면 선도가 떨어져 누린내가 난다. 불쾌한 냄새를 잡으면서 풍미까지 올려준 향신료가 ‘검은 황금’이라고 불린 후추다.
후추는 십자군전쟁과도 연관이 깊다. 십자군전쟁은 11세기 말~13세기 말 서유럽 크리스트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자 8회에 걸쳐 감행한 원정이다. 귀환한 병사들을 중심으로 후추는 유럽에서 대중화됐다. 동방에서 온 이 신비한 향신료는 차원이 다른 고기 요리를 가능케 해줌으로써 ‘신의 선물’ 같은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이 검은 황금은 비쌌다. 15세기의 유럽인들에게 절망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소아시아에서 출발한 오스만투르크 제국(Osman Turk Empire)이 중동에 이어 북아프리카와 유럽 발칸반도를 확보하면서 인도로 가는 육로와 해로를 장악한 것이다. 메흐메트 2세는 1453년 비잔틴제국의 수도면서 동방무역의 중심지이던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을 점령하며 지중해를 내해(內海)로 만들어버렸다. 후추는 더 비싸질 수밖에 없었다.
후추가 일으킨 ‘나비 효과’
유럽인들은 10세기부터 지중해, 홍해, 인도양을 잇는 항로를 통해 동방의 향신료를 수입했다.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이 바닷길이 막히면서 인도로 가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해야만 했다. 신항로 개척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으나 무모해 보이는 도전에 적극적으로 나선 나라들이 있었다. 그동안 동방 무역에서 배제된 포르투갈과 스페인(당시 에스파냐)이었다. 두 나라는 개량형 범선인 카라벨을 이용해 대서양, 인도양을 건너 후추를 찾는 탐험에 나섰다. 이렇게 대항해시대(Age of Exploration)의 막이 열린다.
포르투갈은 새로운 바닷길을 개척해 인도의 후추를 유럽에 상업적으로 대량 공급한 첫 나라가 됐다. 1497년 바스쿠 다가마의 선단은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후추 항 캘리컷에 도착한다. 선단은 이듬해 귀국길에 후추를 가득 싣고 와 화제에 오른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후추에 대한 갈증을 채울 수 없었다.
1502년 바스쿠 다가마는 20척의 선단에 병력을 가득 싣고 평화로운 항구이던 캘리컷을 공격해 점령했다. 포르투갈은 이 같은 침략 행위를 통해 인도양의 제해권을 확보했으며 후추 교역의 주도권을 쥔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을 짓밟고 착취하는 제국주의가 본격적으로 열린 것이다.
스페인도 대항해에 나섰다.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하기 5년 전인 1492년 이탈리아 출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사령관으로 삼은 스페인 선단이 인도로 출항한다. 그런데 그들이 도착한 곳은 인도가 아닌 후일 서인도제도라고 불리는 바하마, 쿠바, 아이티였다. 이 섬들은 당시 유럽인이 인지하지 못했던 아메리카대륙의 부속도서였다.
콜럼버스의 탐험 이후 스페인은 아즈텍제국과 잉카제국을 연이어 멸망시키면서 중남미 대부분 지역을 정복했다. 신대륙에서 후추를 발견하지 못했으나 대신 막대한 양의 금과 은을 발굴했다. 스페인은 당대 유럽의 최고 부국이 됐다. 후추가 아무리 비싸더라도 금과 은으로 구입할 수 있는 상품일 뿐이다.
덩치 큰 북아메리카 비버
콜럼버스가 상륙한 신대륙의 북부에는 후추 못지않게 값진 모피동물이 서식했다. 유럽에서 최고의 모피로 친 것은 평생을 물가에서 살며 열심히 댐을 만드는 비버(beaver)의 것이었다. 유럽 비버(Eurasian beaver)가 지나친 남획으로 멸종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북미에는 유럽 비버의 친척인 북미 비버(North American beaver)가 9000만 마리 넘게 살고 있었다. 더구나 북미 비버는 유럽 비버보다 체구가 커 모피 생산에 더 적합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중남미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 북미에는 네덜란드·프랑스·영국 등에서 모여든 사냥꾼들이 금덩어리나 다름없는 비버를 사냥하고자 각축을 벌였다. 유럽인들이 모피에 열광한다는 사실을 안 원주민들은 이득을 챙기거나 생존하기 위해 유럽인들의 사냥을 돕기도 했다.
당시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대륙으로 이주하는 방식은 대서양을 건너가는 게 일반적 경로였다. 그러나 이와는 다른 루트로 아메리카로 건너간 유럽인도 있었다. 러시아의 사냥꾼들은 광활한 시베리아 들판을 가로지른 후 북태평양의 좁은 해협을 배로 건너 아메리카로 갔다.
현재 러시아는 영토 대국이지만 과거에는 대국과는 거리가 멀었다. 1243년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가 세운 킵차크칸국의 지배를 200년 넘게 받았다. 러시아인들은 몽골로부터 독립하고자 모스크바대공국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나 국력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러시아가 유럽 열강 반열에 오른 것은 로마노프왕조의 표트르 1세(재위 1682~1725) 때부터다. 그의 재위 기간에 러시아는 영토를 우랄산맥을 넘어 태평양까지 확장시켰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는 청(淸)과 만나 나선정벌(羅禪征伐)이라고 불린 전쟁을 벌인다. 1689년 이 전쟁은 청의 승리로 끝났으나 양국은 네르친스크조약을 체결하며 국경을 확정한다.
모피 갈증 채워준 시베리아
러시아가 춥고 척박하고 인구도 희박한 동쪽으로 진출한 것은 단순히 영토 확장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몽골이 물러난 1380만㎢의 시베리아는 비버, 수달, 담비 같은 모피동물의 서식처였다. 시베리아는 살아 있는 보물이 가득한 거대한 창고나 마찬가지였다. 러시아로서는 돈을 벌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열린 것이다.
과거 유럽에서 겨울을 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지금은 보일러 버튼만 누르면 실내가 따뜻해지며 더운 물이 쏟아지나, 과거 유럽의 허술한 주택은 삭풍을 막을 능력이 없어 차가운 공기가 실내로 파고들었다. 벽난로가 내뿜는 열기만으로는 실내에서 모피 코트를 벗을 수 없었으며 잘 때도 모피 이불을 덮어야 했다.
모피는 추위를 이겨내기 위한 실용적 목적 외에도 유럽 귀족이 멋을 내고 격식을 차리는 데 널리 이용됐다. 유럽 귀족이라면 당연히 비버나 수달의 모피로 만든 모자를 쓰고 코트를 입었다. 모피가 마치 군대의 계급장 같은 구실을 한 것이다. 조선시대 때 지체 높은 양반이 실용적이지 않고 오히려 불편해 보이는 큰 갓을 쓰고 다닌 것과 비슷한 일이다.
모피에 대한 유럽인의 갈증을 한동안 채워준 곳은 시베리아였다. 유럽 곳곳에서 시베리아로 집결한 사냥꾼은 눈에 보이는 대로 모피동물을 사냥했다. 모피동물의 씨를 말린 후 다른 곳으로 이동해 사냥을 계속했다. 러시아 사냥꾼에게 지속 가능한 생태계라는 개념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 잡지 않으면 다른 사냥꾼이 잡는다’는 생각이 시베리아의 자원을 빠르게 고갈시켰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러시아의 모피동물 사냥은 주요 산업으로 성장해 국가 재정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러시아는 자국의 수요를 충족시키고 남은 모피를 외국에 판매해 세계적 모피 수출국 반열에 올랐으나 지나친 남획으로 한계에 도달한다. 러시아 처지에서는 모피 산업을 유지할만한 또 다른 사냥터가 필요했다. 이때 러시아인의 눈을 사로잡은 사냥터가 북태평양 건너 아메리카대륙의 북단 알래스카였다.
베링해 넘어 알래스카로
17세기부터 유럽에서 모여든 사냥꾼과 장사꾼들이 북아메리카 동부에서 모피동물을 사냥하거나 가죽을 수집했다. 그 결과 북미 동부의 모피동물은 빠른 속도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사냥감이 부족해진 동부의 사냥꾼들은 모피동물을 찾아 아직 유럽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중부, 서부로 향하게 된다. 모피를 향한 인간의 욕망이 아메리카대륙 서부 개척의 원인 중 하나가 된 것이다.
팽창 욕구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러시아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표트르 1세는 탐험대를 조직해 태평양을 건너 아메리카대륙으로 가도록 지시한다. 이 중에 덴마크인 베링이 이끄는 탐험대도 있었다. 베링은 1741년 알래스카 탐험 후 귀국길에 비타민C 부족이 원인인 괴혈병으로 숨지고 만다. 괴혈병은 대항해시대 선원들의 직업병이나 다름없었다.
베링은 비록 천수를 누리지 못했지만 그의 업적을 기려 시베리아와 알래스카 사이 바다는 베링해 또는 베링해협으로 불리게 됐다. 모피동물이 죽어서 가죽을 남기듯 베링은 바다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셈이다.
러시아 사냥꾼들은 새로운 사냥터인 러시아령 아메리카(1773~1867)에서 활개를 쳤다. 알래스카에는 비버는 물론, 수달의 사촌이면서 덩치가 제법 큰 해달(Sea Otter) 같은 최고급 모피동물도 많았다. 바다사자, 물범, 물개도 풍부했다. 이렇게 확보된 모피는 유럽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러시아 사냥꾼의 남획은 부작용을 낳았다. 해달은 멸종 위기에 처한다. 러시아인이 북미에 진출하기 전까지 태평양 해안에는 30여만 마리의 해달이 살았으나 그 수가 수백 마리 수준으로 격감하고 만다. 해달의 불행은 단순히 해달이라는 동물 한 종의 비극으로 그치지 않았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아바타’에서 알 수 있듯 무관해 보이는 여러 동식물의 운명이 서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턱밑까지 들어온 단도
해달은 아시아의 미식가들이 즐기는 성게를 주식으로 삼는다. 해달이 사라지면 그곳 생태계는 균형을 잃고 급속히 무너지고 만다. 해달이 사는 곳에서는 성게가 급증하지 못하고 일정한 개체 수를 유지한다. 성게의 주식 켈프는 다시맛과에 속하는 갈조류로 해면에 뿌리를 단단히 내리고 육상의 숲과 같은 거대한 군락을 이룬다. 이런 켈프가 빽빽이 자리 잡으면 바닷물의 유속이 느려질 수밖에 없다. 이런 조건은 알을 낳는 물고기나 갓 태어난 치어가 살아가기에 훌륭하다. 천적을 피해 성장하는 데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켈프 숲이 울창하면 해양생태계는 건강하게 마련인 반면 해달이 사라져 성게가 창궐하면 그곳 바다는 마치 육지의 사막과 비슷하게 돼 어족 자원이 고갈된다. 아무도 원치 않는 일이다.
러시아에 허락된 시간은 짧았다. 러시아는 여러 이유로 신생국인 미국에 알래스카를 양도했다. 알래스카는 수도인 모스크바에서 너무 멀어 지속적 관리가 어려웠다. 만약 영국 같은 적대국의 군대가 침공하면 방어하기 곤란했다. 크림전쟁 패전 후 재정 수요도 급증했다. 당장 현금이 필요한 처지가 된 러시아는 자국에 덜 위협적이라고 판단되는 미국에 알래스카를 매각했다. 당시 러시아의 처지에서 알래스카 매도는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거래처럼 보였으나 이는 근시안적인 것이었다. 1867년 미국은 러시아로부터 720만 달러에 알래스카를 매입한다. 당시 미국 여론에선 “쓸모없는 동토를 비싸게 샀다”는 비판적 의견이 다수였다.
얼마 후 반전이 일어난다. 알래스카에서 금은 물론 기름까지 쏟아졌다.
그게 다가 아니었다. 알래스카는 새로운 주인인 미국에 지하자원보다 훨씬 중요한 혜택을 제공한다. 미소 냉전 시절 알래스카는 소련을 견제하는 미국의 중요한 군사기지가 됐다. 소련 처지에서 알래스카는 턱 바로 밑까지 치고 들어온 단도였다. 또한 알래스카는 미국이 태평양의 패권국가가 되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한다. 알래스카의 해안선을 통해 태평양을 사실상 자국의 내해로 만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해안 따라 국경 길게 내려간 이유
알래스카와 캐나다의 국경선은 미국과 캐나다의 다른 국경과 모양이 사뭇 다르다. 미국 본토와 캐나다의 국경은 마치 긴 자를 대고 일직선으로 쭉 그은 모양이다. 반면 알래스카 쪽 국경선은 미국 영토가 살아 있는 동물처럼 해안선을 타고 길게 내려가는 모양새다. 이런 특이한 국경선도 러시아인의 모피 사냥과 관련이 있다. 러시아인이 태평양쪽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면서 해달, 바다표범, 물개 같은 해양포유류를 남획했기 때문이다. 일부 러시아인들은 캘리포니아 북부까지 내려와 마을을 세우고 살았다.
후추에 대한 유럽인의 열망이 의도치 않은 지리상의 발견으로 이어진 것처럼 모피에 대한 유럽인의 열망은 미국과 러시아가 대국이 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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