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주류시장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술은 맥주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2015년 발표한 ‘세계 주류시장 동향 및 소비현황 분석’에 따르면 맥주는 세계 술 소비량(출고량)의 76.1%를 차지하는 압도적 1위다. 이어 증류주(11.4%), 와인(10.3%) 순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전 세계 증류주(Spirit·소주를 포함한 위스키, 진 등) 소비 1위 국가인데, 이러한 한국에서도 맥주 소비량이 전체 주류 소비량의 53.8%를 차지한다(2017년 국세청 자료·출고량 기준). 맥주를 소주(25%)의 2배 이상 마시는 것이다.
맥주 소비량이 이처럼 많은 이유는 도수가 낮아 비교적 마시기 편하고, 산업혁명을 계기로 기간산업화에 가장 성공한 술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맥주 소비시장을 석권하고자 세계 유력 맥주기업들은 인수합병을 통한 몸집 부풀리기에 힘쓴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오비맥주의 모회사 AB인베브다. 전 세계 판매량 톱10 맥주 가운데 5개가 이 회사 제품이다. 국내에서는 카스로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 아사히맥주는 2016년 체코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을 포함해 8개의 유럽 맥주회사를 인수했고, 기린맥주 역시 호주 라이온 네이선(Lion Nathan)을 시작으로 2009년 필리핀 산미구엘 맥주, 미얀마 최대 맥주회사 미얀마 브루어리(MBL)를 인수했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법. 이러한 ‘맥주 획일화’에 싫증을 느낀 소비자를 겨냥한 것이 크래프트 맥주(Craft Beer)다. 수제(手製)라는 뜻의 단어 ‘크래프트’가 시사하듯, 크래프트 맥주는 차별화된 개성으로 소비자와 소통한다. 국내에서도 제주맥주, 더부스, 어메이징브루잉컴퍼니 등과 같은 크래프트 맥주가 인기다.
결국 대형화와 소형화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이 전 세계적인 맥주 추세다. 그렇다면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국 맥주는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까. 2019년 한 해 동안 사활을 걸고 벌어질 맥주 트렌드를 예상해본다.
국산맥주, 멀어진 고급화
국산맥주의 고급화는 거의 전무하다. 오비 프리미어 필스너(Premier Pilsner), 하이트진로 퀸즈에일(Queen’s Ale) 등 한때 고급화가 시도됐지만 소비자로부터 주목받지 못했다. 여태껏 고급화를 추구하지 않다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자 부랴부랴 만든 듯한 이미지라서 그렇다. 단순히 맛 하나의 문제로 실패한 것은 아니다.
이후 국산맥주는 저가 전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017년 하이트진로가 출시한 ‘1만 원에 12캔’을 주는 발포주 필라이트(FiLite)는 2018년 총판매량 4억 캔이라는 준수한 성적을 냈다. 발포주는 맥아 비율을 10% 미만으로 해 주세법상 맥주가 아닌 기타주류로 분류된다. 맥주라기보다 ‘발포성 맥주맛 알코올음료’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맥주에 붙는 주세가 판매가의 72%인 데 반해 기타주류는 30%에 그친다. 따라서 가격을 대폭 낮췄다. 발포주시장에 회의적이던 오비맥주도 2월 발포주 ‘필굿(FiLGOOD)’을 출시한다. 이쯤 되면 클라우드와 피츠를 가지고 있는 롯데주류도 발포주시장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참고로 발포주란 일본에서 유래한 단어다. 1995년 거품 경제가 붕괴하고 불황이 닥치자 일본에서는 발포주가 앞다퉈 출시되기 시작했다. 일본 맥주 기준인 맥아 비율(당시 66.7%, 현재는 50%)을 낮춰 주세를 적게 내는 맥주맛 알코올음료가 대거 등장한 것이다.
특이한 것은 한국은 맥아 비율이 10% 미만인 경우에 발포주라고 하지만, 일본은 맥아 비율이 적어도 25%를 넘어야 발포주라고 한다는 점이다. 일본 기준으로 보면 한국의 발포주는 발포주가 아니다. 그리고 한국 주세법에는 일본과 달리 발포주란 말이 없다. 발포주는 기업과 미디어가 일본에서 끌어다 쓴 단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아무튼 올 한 해 국내 맥주 대기업은 이 발포주시장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물론 국내 맥주 대기업들이 고부가가치의 맥주시장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오비맥주는 자회사 ZXV(ZX Ventures)를 통해 미국 시카고의 수제맥주 브랜드 ‘구스아일랜드(Goose Island)’를 국내에 유통한다. 국내 수제맥주업체 핸드앤몰트도 인수했다. 하이트진로 역시 지난해부터 ‘스컬핀(Sculpin) IPA’로 유명한 밸러스트포인트의 수제맥주와 영국 수제맥주 ‘브루독(Brew Dog)’을 유통·판매하고 있다. 자사 브랜드로는 고급화 전략이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인수합병 및 판권 확보로 고급 맥주시장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맥주도 ‘지역 특산주’ 된다면
올해 주류업계의 가장 큰 화두는 주세 방식의 변경이다. 현재 정부와 국회는 제품 가격에 세금을 매기던 종가세에서 용량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종량세로 주세 방식을 바꾸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현행 종가세 체제에서는 비싼 술일수록 세금을 더 많이 낸다. 따라서 기업 처지에선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 고급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특히 맥주와 소주는 72%의 높은 주세를 지불해야 하는 만큼, 고부가가치 제품보다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비) 좋은 제품 위주로 개발·생산돼왔다.
그런데 가격과 관계없이 용량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종량세가 시행되면 고가 제품은 가격이 내려가고, 반대로 저가 제품은 가격이 올라갈 수 있다. 종량세가 가져오는 장점은 고부가가치 제품을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국산 맥주가 저렴하게 대량으로 수입하는 원료를 사용하는데, 종량세 하에서는 소량이라도 우리 농산물을 맥주 원료로 쓰는 제품이 나올 수 있다.
주세의 종량세 전환을 가장 반색하는 쪽은 크래프트 맥주업계다. 크래프트 맥주는 발포주와 ‘4캔에 1만 원’ 수입맥주에 밀려 마트나 편의점에서 존재감이 떨어졌다. 그러나 종량세가 실시되면 크래프트 맥주 가운데 병당 가격이 4000~5000원에서 2000~3000원으로 낮아지는 제품이 생긴다. 국산이나 수입맥주보다는 그래도 가격이 높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생산지의 특성이나 크래프트 맥주 특유의 소통 마케팅으로 승부수를 던져볼 만하다. 그간 수입맥주의 전유물이던 ‘4캔에 1만 원’ 프로모션도 진행해볼 수 있다. 소비자 처지에서는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이다.
종량세 전환으로 기대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국산 농산물 활용 확대다. 맥주 원료인 보리, 맥아, 홉 등은 현재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국내에서 맥주용 원료를 거의 생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설령 생산하다 해도 가격이 지극히 높다. 종량세가 정착돼 주세로 인한 제조업체 부담이 줄어든다면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 그리고 대기업도 국산 농산물을 사용하려 할 것이다. 1980년대 강원도 일대에서 홉을 재배한 적 있지만, 농산물 수입 개방 등에 밀려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현재 뜻있는 크래프트 양조장 및 농가 몇 군데가 적게나마 홉을 재배해 맥주 생산에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현상이 종량세 전환으로 더욱 늘어날 것으로 기대된다. 이는 맥주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주종 불문하고 국산 농산물을 사용하는 비율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이렇게 국산 농산물을 활용한 제품이 늘어난다면 ‘지역 특산주’ 영역에 크래프트 맥주가 들어갈 수도 있다. 지역 특산주란 농민 및 농민단체가 그 지역의 농산물을 활용해 빚는 주류로, 주세 50%를 감면받는다. 무엇보다 지역 특산주가 누리는 혜택은 인터넷 판매가 허용된다는 점이다. 현재 지역 특산주는 탁주, 약주, 청주, 증류주, 과실주 등에만 적용된다. 맥주는 빠져 있다. 하지만 지역 특산주에 맥주가 포함된다면 크래프트 맥주에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판로가 열린다. 이는 국산 농산물 사용 빈도를 더 높일 것이다. ‘오늘은 수제맥주’ 저자 오윤희 씨는 “종량세로의 전환은 수제맥주의 그린라이트”라고 평가했다. 종량세 전환으로 가까운 미래에 100% 우리 농산물로 빚은 다양한 수제맥주가 출시되는 시대가 열리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박차 가하는 ‘혼술 시대’
한편 2019년에는 맥주 캔 사이즈가 다양해진다. 특히 용량이 작은 제품이 다양하게 출시될 것이다. 주52시간 근무제로 인당 알코올 섭취량이 줄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가볍게 한잔하는’ 혼술시장은 커지고 있다.
알코올 소비량의 변화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인당 연간 알코올 소비량은 1980년 14.8ℓ에서 2015년 10.9ℓ로 하락했고, 2016년에는 8.9ℓ로까지 떨어졌다. 30여 년 전부터 혼술시장에 주목해온 일본의 경우 맥주 캔 용량이 135㎖에서 3ℓ까지 다양하다. 양이 아닌 맛으로, 회식보다 집에서 홀로 쉬면서 한잔 마시는 문화가 확대되리라는 점은 확실하다.
10년 전만 해도 국내 맥주시장에서 소비자가 갖는 선택권은 지극히 적었다. 2000년 전에는 ‘오비냐 크라운이냐’, 2000년 이후에는 ‘카스냐 하이트냐’ 등 양자택일 수준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저가의 발포주, ‘4캔에 1만 원’의 수입맥주, 전국에 120개나 되는 크래프트 맥주, 카스·하이트 등 4파전 맥주시장으로 재편됐다. 이 중 발포주와 수입맥주시장은 올해도 더 성장하고, 크래프트 맥주시장은 종량세 전환을 기다리고 있다. 결국 카스·하이트의 시장 점유율은 계속 떨어질 것이다. 그다지 개성도 없는데 가격은 발포주보다 비싸기 때문이다. 수세에 몰린 카스·하이트가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 나갈 것인지도 올해 맥주업계를 관전하는 주요 포인트다.
명욱은…
인문학, 경영, 역사와 문화, 음식 등 다양한 시각에서 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전문 칼럼니스트. 일본 및 싱가포르에서 13년을 보낸 경험을 토대로 취하는 술 문화에서 음미하고 소통하는 술 문화로 변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한국 전통주를 비롯해 일본 맥주, 사케, 소주, 와인에 특화돼 있다. 현재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 과정 교수로 재직 중이며 팟캐스트 ‘말술남녀’, KBS 제1라디오 ‘김성완의 시사夜’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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