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의 화제로 떠오른 ‘예비타당성 조사(예타)’는 1999년 김대중 정권 때 ‘타당성 조사’를 보완하기 위해 만들었다. 타당성 조사를 사업 주무 부처가 주관하다 보니 객관성과 신뢰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1994∼1998년 완료된 33건의 타당성 조사 중 울릉공항 건설사업을 제외한 32건이 모두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결론 나기도 했다.
예타는 예산당국이 개략적인 경제성과 정책적 고려 등을 분석해 성공 여부를 먼저 판단하는 절차다. 타당성 조사는 공법 같은 기술성도 함께 분석해 물리적인 성공 여부까지 점검한다. 두 조사의 목적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국민들이 모아 준 돈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자는 것이다. 설 직전 정부는 예타를 면제하는 23개 사업을 발표했다. 24조1000억 원 규모다. 예타 면제를 받은 지역구의 의원들은 설 연휴 ‘치적’ 자랑에 바빴을 것이다. 올가을 2020년도 예산 심사에서는 관련 사업의 초기 예산 반영을 위해 또 한바탕 정치권의 나눠먹기 잔치가 있을 공산이 크다. 그 6개월 이후에 21대 총선이 치러지기 때문이다. 1년 9개월 전에 들어선 이번 정권이 예타를 면제한 사업규모(53조7000억 원)는 직전 박근혜 정권(23조 원)보다 많고, 그 이전 이명박 정권(60조 원)에 벌써 육박하고 있다.
도깨비가 딱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고 할 때 어떻게 하면 욕심을 다 채울 수 있을까. 도깨비가 당황할 수밖에 없는 답변은 ‘도깨비 방망이를 달라’는 것이다. 예타를 규정한 국가재정법 38조 2항에 그런 ‘도깨비 방망이’ 같은 예외가 들어 있다. 예외 조항은 모두 10개로 ‘국가 안보 관련 사업’ ‘문화재 복원 사업’ ‘재난 예방에 시급한 사업’ 등이고, 마지막에 ‘지역 균형 발전, 긴급한 경제·사회적 상황 대응 등을 위하여 추진이 필요한 사업으로 사업계획이 수립돼 있고 국무회의를 거친 사업’이라는 조항이 있다.
정부는 최소 24조 원이 들 사업을 추진하며 ‘지역균형 발전’이라는 단 여섯 음절만 얘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3개 사업 중 예타에서 탈락했던 7개 사업은 물론 나머지도 지역균형 발전에 어떻게 도움이 된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1개 사업의 예타에도 수개월이 걸리는데, 지난해 11월 지자체 설명회 이후 사실상 3개월 만에 23개 사업을 선정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예타 면제 조항은 2009년 3월 이전까지는 5가지였다가 이명박 정권이던 당시 지역균형 발전 등의 조건이 들어가면서 10가지로 늘었다. 4대강 사업이 예타 면제를 받고 추진됐다. 예타를 거쳐서 사업을 수행해도 수요 예측 실패 등으로 수십 년간 세금이 낭비되는 여러 경전철 같은 사업이 수두룩하다. 주요 인프라 건설 사업은 후세대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예타조차 거치지 않은 것은 우리 자식들의 주머니를 터는 것과 진배없다. 투명함과 공정함의 상징인 촛불시위로 정권을 잡은 이 정부는 한술 더 떠서 예타 면제 대상을 더 확대하는 제도 검토 작업을 시작했다. 홍남기 부총리는 올해 6월까지 끝내겠다고 밝혔다. 정치권에서 맞장구치는 소리도 들려온다.
인치(人治)가 아닌 법치(法治)를 위해 훌륭한 제도를 만들었지만 점점 허물어지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예타 면제 사업을 사실상 마음대로 지정할 수 있는 상태고, 이를 견제해야 할 국회는 지역구 이익 때문에 부화뇌동(附和雷同) 중이다. 주인이 자리를 비우면서 생선을 고양이들에게 맡긴 꼴이다. 자식들이 세금 폭탄을 맞을 위험도 더 커지고 있다.
이념이나 정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는 구호가 1년 9개월 전에 드높았다. 시민단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예타 면제 반대 목소리가 눈에 띄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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