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일본 도쿄 소프트뱅크 본사에서 손정의 회장(62)은 한국에서 찾아온 한 40대 벤처 기업인을 엘리베이터 앞까지 정중하게 배웅했다. ‘아시아의 스냅챗’이라 불리는 동영상 채팅 애플리케이션 스노우의 김창욱 대표(42)였다. 소프트뱅크 등으로부터 5000만 달러(약 555억 원) 투자를 유치한 김 대표가 손 회장을 처음 방문한 길이었다. 김 대표는 이날 30분 남짓한 프레젠테이션(PT) 시간 대부분을 스노우가 아니라 아직 개발단계인 3차원(3D) 아바타 앱 설명에 할애했다. 손 회장은 “앞으로 3D 아바타로 할 수 있는 일이 굉장히 많을 것 같다”고 한참을 맞장구쳤다.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한 이준표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37)는 전날까지 김 대표에게 “잘나가는 스노우에 대해 PT를 해야 한다”고 제안했던 자신의 안목을 탓해야 했다. 프로는 프로를 알아본다고, 지난해 8월 출시된 3D 아바타 제작 앱 ‘제페토’는 3개월 만에 전 세계에서 다운로드 1200만 건을 넘으며 15개국에서 다운로드 순위 1위를 기록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강남구 소프트뱅크벤처스 본사에서 만난 이 대표는 “좋은 투자자의 덕목은 창업자의 도전을 독려하는 것”이라며 “계획뿐이던 사업의 미래와 가능성을 읽고 창업자보다 더 흥분하던 손 회장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소프트뱅크벤처스는 일본 소프트뱅크그룹에서 유일하게 초기 벤처 투자를 맡는 벤처캐피털(VC) 업체다. 2000년부터 한국 미국 중국 등 총 10개국 250개 업체에 6800억 원을 투자하며 될성부른 스타트업을 발굴해 성장시키는 스케일업 역할을 해왔다. 이 대표는 자신이 창업한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에빅사)와 동영상 검색업체(엔써즈)에 투자받은 것을 인연으로 2015년 아예 소프트뱅크벤처스에 합류했다. 자신이 창업한 회사는 LG유플러스와 KT에 매각했다.
이 대표는 국내 스타트업의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돼 온 스케일업에 대해 “환경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라고 했다. “전 세계를 다녀 보면 한국만큼 창업 정책자금이 많고 투자받기 좋은 나라가 없다. 기존 산업이 작지 않아 혁신 기회도 많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는 “창업가들이 규제 때문에 못한다고 하지 말고 힘들더라도 부딪혀서 변화를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구 절반이 수도권에 살고 온라인 거래와 결제 비중이 한국보다 높은 곳은 중국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한국은 핀테크(금융), 모빌리티(운송업) 등 기존 산업 질서를 재편해 시장 주도권을 가지는 게임체인저가 될 기회가 그만큼 많다”고 했다.
그는 스타트업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규제에 대해 비판도 했다. 10년 전 일이지만 정부의 규제정책으로 애플의 아이폰을 미국에서 출시된 지 2년이나 지나 한국에 들여왔고, 이 때문에 인터넷 주도권을 모바일로 연결시키지 못했다는 게 이 대표의 시각이다. 최근 유튜브, 넷플릭스가 선전하자 이를 규제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마치 ‘구한말 쇄국정책’ 같다”고 했다. 기존 산업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행태는 사라져야 한다는 게 이 대표의 주장이다.
이 대표는 “규제로 인한 갈등 해결의 핵심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걷어내는 것이다. 정부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 기존 산업군이 생존의 위협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해야 하지만 그러다 보면 자칫 새로운 싹을 잘라버릴 수 있다. 기존 산업군도 변화를 통해 자체적인 대응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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