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초단위로 부숴 쌓아올린 소설이다. 낱낱이 해부된 비극의 조각들이 페이지마다 아프게 밟힌다. 배경은 우주의 중심인 ‘태고’. 이승과 저승의 경계이자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공간이다. 폴란드 작가인 저자는 태고를 터전으로 삼은 이들의 비루한 일생을 고집스레 뒤쫓는다. 그리고 거듭해 묻는다. ‘신은 존재하는가’ ‘운명은 누가 결정하느냐’라고.
짤막한 분량의 조각글 84편이 하나의 이야기를 향해 전진한다. 각 조각글에는 ‘○○의 시간’이란 머리글이 달렸다. 남편이 전쟁에 나간 사이 새파란 청년에게 설렘을 느끼는 게노베파의 시간, 딸과 결혼을 약속한 남자를 질투하는 미하우의 시간, 경험한 모든 선과 악을 체화하는 크워스카의 시간….
이웃 격인 이들의 시간은 얽히고설켜 거미줄 같은 관계를 형성한다. 크워스카의 딸 루타는 게노베파의 아들과 비밀을 공유하고, 게노베파의 딸과 보시키 영감의 아들은 사랑에 빠진다. 크워스카는 느닷없이 광기에 사로잡힌 플로렌틴카의 딸이 되길 청한다. 이런 복잡한 관계는 진창 같은 현실에서 기댈 곳은 서로의 어깨뿐이라는 메시지로 읽힌다.
인간 심연을 꿰뚫는 작가의 시선은 3대에 걸친 서사를 비범의 영역으로 이끈다. “총을 쏜 건 그들이 아니었다. 낯선 나라에서 느끼는 공포와 고향을 향한 향수가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하늘이 마치 통조림통의 뚜껑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속에 신이 사람들을 가두어놓은 것만 같았다.” “신은 여섯 번째 세계를 우연히 창조하고는 떠나버렸다. … 홀로 내팽개쳐진 여섯 번째 세상은 그리하여 스스로 창조를 시작했다.”
‘방랑자들’로 지난해 맨부커상을 수상한 올가 토카르축의 첫 국내 출간 장편소설이다. 유대인 학살과 1·2차 세계대전, 냉전체제 등 폴란드를 훑고 간 역사적 비극을 곳곳에 배치했다. 환상 문학과 다큐멘터리의 중간 지점에서 실재보다 더 생생하게 현실을 구현했다. 책장을 덮고 나면 온 세상이 새로워 보이는 착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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