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훈련이 협상 칩인가? 클라우제비츠의 경고[신석호 기자의 우아한]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3월 4일 13시 57분


채널A의 베트남 하노이 특설 스튜디오가 마련된 곳은 시내 중심가에 있는 호안끼엠 호수 인근 렉스 호텔의 13층 옥상이었습니다. 지난달 26일부터 28일까지 현지 특보 해설위원으로 초빙돼 아침에 출근해서 특보들에 출연하고 저녁에 종합뉴스 해설을 마친 뒤 땅으로 내려오는 특이한 생활을 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태운 비스트 1호 승용차가 숙소인 메리엇 호텔에서 나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회담 장소였던 메트로폴 호텔로 가고 오는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하며 해설할 수 있었습니다.




그 높이가 몇 십 미터나 될까. 옥상 스튜디오에 올라 있으면 호수를 둘러싼 하노이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뿌연 매연 속의 도시, 촘촘히 들어선 프랑스풍의 건물들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베트남전쟁 당시 1965년부터 시작된 하노이 북폭에 참여한 미군 조종사들과 이에 맞선 베트남 조종사들의 시야가 조금이나마 상상이 되었습니다. 소련제 미그기를 타고 미군 폭격기에 맞선 이들 가운데엔 북한에서 파병된 공군 조종사들도 있었습니다. 북한의 베트남 파병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신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은 “조종사 수 백 명을 비롯해 북한 군 5000~1만 명 미만(연인원)이 파견되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파병 당시 김일성 주석의 유명한 발언들도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1965년 파병 여부를 결정하면서 김 주석은 “젊은 조종사들이 실제 전쟁을 경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6·25전쟁 당시 맞섰던 미군 전투기들과 다시 대결해 봄으로써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는 제2의 남침에 대비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평화 시에 전쟁 대비를 하기 위해 장교들을 외국에 보내 경험하게 하라”는 프로이센의 전쟁 철학자 칼 폰 클라우제비츠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기도 했습니다.




김 주석은 또 “베트남이 제공하는 전투기를 잘 몰고 승리한 뒤 그 비행기를 타고 북으로 돌아오라”고 말했다고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가 기자의 하노이 출장 전인 19일 귀띔했습니다. 실제로 북한은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 되자 1978년 말 인민무력부장 백학림 단장을 비롯한 군사대표단을 베트남에 보내 “이제 우리가 한반도 통일을 할 차례”라며 베트남 정부에 F-4 팬텀기 4대 등 미군 장비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태 전 공사는 “이 사실을 안 소련 측이 ‘절대 안 된다. 저걸 주면 북한이 남한과 전쟁을 시작할 것”이라고 반대했다고 전했습니다. 베트남이 거부하자 북-베트남 관계는 다시 악화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태 전 공사가 “베트남이 한반도 문제와 엮이면 결과는 한국에 유리했다”고 한 대목은 결과적으로 앞을 내다 본 선견이었습니다. 당시 그는 “베트남전쟁 패전 이후 미국은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해 깊은 고민과 연구를 시작했다. 하지만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만에 빠져 결국 붕괴하게 되었다. 북한도 1968년 무장공비 파견 등 무모한 대남 무력도발과 중화학 군수공업 편중 경제정책을 펴다 경제의 균형을 스스로 무너뜨렸다”고 지적하면서 하노이 회담이 잘 되지 않을 가능성을 제기했습니다.




실제로 하노이 담판을 폼 나게 노렸던 김정은 위원장은 ’때로는 테이블을 박차고 나가야 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의 기술‘에 제대로 걸려 빈손으로 평양행 기차를 타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1호 열차를 타고 중국을 관통해 북향하던 그는 뜻밖의 귀향 선물을 받은 듯합니다. 한국과 미국이 바로 이달로 다가온 키 리졸브 연합군사연습과 독수리 훈련을 아예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입니다. 합동 군사연습과 훈련의 중단 또는 축소는 북한이 영변핵시설 동결에 합의했을 경우를 상정하고 논의되었던 ’상응조치‘의 하나였습니다.

일각에서는 “북한 비핵화를 이끌기 위한 유인책”이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지만 이번 결정은 지난달 28일 김정은과의 협상이 결렬된 뒤 기자회견을 가진 트럼프 대통령이 “훈련에 수억 달러가 들어간다. 워 게임(war game)을 할 수 있는데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자 나온 조치입니다. ’있을지도 모를 북한의 전쟁 도발을 막는데 돈 쓰기 싫다‘는 순전히 경제적 이유라는 이야기지요. 만일의 가능성을 대비하는 것이 안보요 그 핵심은 훈련입니다. 이미 지난해 6월 12일 1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트럼프 대통령이 연합훈련 중단을 선언했을 때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에 나오는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전쟁의 마찰(friction)과 훈련의 필요성

“우리는 위험, 육체적 노고, 정보, 마찰을 서로 연합해 전쟁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요소들이라고 정의하였다. 행동을 방해하는 매개물이 된다는 제한성 때문에 일반적인 마찰이라는 단일 개념으로 묶을 수 있다. 마모를 줄일 수 있는 윤활제가 있을까? 단 하나가 있지만 장군이나 군대가 항상 즉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전투 경험이다. (중략) 평화 시의 기동작전은 진짜 전투 경험의 약한 대체제이지만 일상적이고 기계적인 훈련보다는 부대에 이점을 줄 수 있다. 기동작전을 계획하는 것은 경험 없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장점이 더 많다. 작전에 포함된 마찰의 요소들은 장교들의 판단력과 상식과 결단력을 단련한다. (중략) 평화 시에 전쟁에 대한 익숙함을 얻는 다른 매우 유용한-비록 제한적이지만-방법은 실제 복무해본 외국의 장교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다른 대안은 장교들 일부를 전투장에 보내 전쟁이 어떤 것인지 배우게 하는 것이다.”

Clausewitz, Carl von, On War, ed. and trans. by Michael Howard and Peter Paret,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6), p. 122.

비록 북한과 미국이 여전히 비핵화 대화를 이어나가겠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이번 합의 결렬에서 드러난 것처럼 양측의 인식과 이해관계 차이는 너무나 큰 상황입니다. 자칫 북한은 핵과 미사일 능력을 보유한 채 미국과 국제사회의 제재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고난의 행군‘을 선택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 멀고 먼 길에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성과 다양한 상황에 대비해야 할 때, 미국의 일방적인 결정에 따라 가장 중요한 양국의 연합훈련이 중단되는 상황에 다양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전쟁은 한 사람의 일생을 통해 어쩌면 한번 직접 체험할까 말까 할 정도로 드문 사건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신(神)은 마치 죽음처럼 늘 살아있는 우리와 함께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전쟁의 신에 대처할 올바른 전쟁 방법, 즉 올바른 군사전략을 준비하는 것이 될 것이다(강성학 고려대 명예교수, ’전쟁신과 군사전략‘ 리북, 2012).”

협상의 달인이라고 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 신을 알고 있는 걸까요.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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