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쓸 수 있을까/테오도르 칼리파티테스 지음·신견식 옮김
/196쪽·1만2000원·어크로스
쓰는 행위로만 존재해온 일흔일곱 살 노작가는 어느 날 거짓말처럼 언어를 잃는다. 몇 가지 구상이 떠올라 덤벼 봐도 도통 쓸 수가 없다. 문장은 아무래도 신통치 않고 단어는 곱씹을수록 뒷맛이 쓰다.
1969년 첫 소설을 낸 이후로 그의 작품세계는 저절로 번성했다. 막힘없이 글이 나왔고, 모든 책은 그 다음 책으로 넘어가는 다리였다. 40여 권의 책을 펴낸 노작가는 쓰지 못하는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다. “형편없는 글을 써서 갈매기조차 키득거리면 어떡하나. 글을 아예 쓰지 않는 것보다도 후지게 쓰는 것이 두렵다.”
눈물겨운 노력에도 차도가 없자 그는 결국 마음을 바꿔 먹는다. “이제 모든 것을 뒤로하고 떠날 때가 됐다. 내 고국에서 이민을 떠나왔듯이 나 스스로에게서 이민을 떠날 때가 됐다.” 그렇게 절필을 선언한 그는 ‘쓰지 않는 삶’에 도전한다.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아내와 함께하는 아침식사에 적응하고, 동네 어귀를 유랑한다. 마음 가는 대로 시간을 보내던 그의 생각은 ‘뿌리’에 가닿는다. 국가 부도에 몰린 그리스를 향해 쏟아지는 조롱 속에서 그는 읊조린다. “뿌리로 되돌아갈 때가 온 걸까.” “스웨덴에서 50년을 살았던 내가 다시 그리스인이 되어 라디오 방송국과 TV 채널을 오가며 그리스인의 집단적 죄의식을 함께 나눠야 했다.”
뿌리를 향한 여정은 그리스 고향집으로 이어진다. 어머니의 집에서 그는 끝내 기억에 제대로 접속하지 못한 채 절망한다. “모르겠어. 뭔가 있긴 한데. … 생각이나 기억 같은 것. 근데 아무것도 없어.” “나하고 언어 사이를 가른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오랜 세월 친구였는데.”
이 책은 작가가 모국어인 그리스어로 쓴 첫 책이다. 오랫동안 제쳐뒀던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더듬으며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느끼고, 그 과정을 그리스어로 기록했다. 글쓰기, 나이 듦, 자유와 관용 등의 주제를 따스하고 유쾌하게 넘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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