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가입 초기엔 주식비중 늘려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20일 03시 00분


퇴직연금 수익률 높이기 전략
장기투자땐 주가 폭락 위험 피해, 실적배당 통해 적립금 많이 쌓아야
은퇴 다가오면 안전자산 점차 확대… 생애주기별 자산 배분 적극 활용
은퇴 후엔 일시불 아닌 연금형 수령, 적립금 불릴 인출형 상품에 관심을

“괜찮은 퇴직연금 펀드 하나만 찍어줘요.”

매년 이맘때면 금융 담당을 오래한 기자가 자주 받는 요청이다. 50대 직장인 A 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2006년 5월에 퇴직연금에 가입했다. 비슷한 시기에 퇴직연금에 가입한 지인의 수익률과 자신의 것을 비교한 결과 큰 차이가 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기자를 찾은 것이다. 그가 가입한 퇴직연금의 연환산 수익률은 2.93%. 반면 그의 지인은 7.08%나 됐다.

이달 7일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지난해 퇴직연금의 운용수익률은 1.01%로 처참한 수준이다. A 씨도 선방했다고 평가받을 정도다. 막연하게 퇴직연금을 묵혀뒀다가는 A 씨와 같은 후회를 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퇴직연금을 은퇴 이후 소득으로 잘 활용하려면 무엇보다 은퇴 이전에 적립금을 많이 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를 위해 적립금을 효율적으로 운용해 수익률을 높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연금 가입자가 지금보다 더 퇴직연금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은퇴 이후엔 적립금을 일시불로 찾을 게 아니라 연금으로 받아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 밖에도 퇴직연금 운용 수익률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도록 관리해야 할 일들이 적잖다.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연금 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방안들을 정리해본다.

○ 위험자산 비중을 높여라

A 씨와 그의 지인의 퇴직연금 수익률이 큰 차이를 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운용상품 내용에서 비롯됐다. A 씨는 2006년 처음 확정급여(DB)형에 가입했다가 2011년 6월 확정기여(DC)형으로 갈아탔다. 이때 그는 운용상품을 모두 원리금보장 상품인 1년 만기 정기예금으로 채웠다. 반면 처음부터 DC형에 가입한 A 씨의 지인은 주식형과 채권혼합형, 채권형 펀드 등 실적배당형 상품을 적극 이용했다.

투자시장 격언 가운데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는 말이 있다. 큰 위험을 감수할 때 큰 이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A 씨처럼 리스크가 낮은 원리금보장 상품으로는 애당초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지난해 퇴직연금 수익률이 1%에 머문 것도 퇴직연금 적립금(190조 원)의 90.4%인 171조7000억 원이 원리금보장 상품에 묶여 있기 때문이었다. 전문가들은 따라서 A 씨가 조금이라도 수익률을 높이고 싶다면 주식형펀드 같은 위험자산 비중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각에선 퇴직연금이 노후소득의 최후 안전판인 만큼 원리금보장 상품에 투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반론도 제기한다. 주식시장은 언제든 약세장이 될 수 있고, 이 경우 손실을 볼 수 있기에 일리 있는 지적이다. 실제로 코스피가 17.28% 하락한 지난해 실적배당형 퇴직연금 상품은 3.82%의 손실을 기록한 반면 원리금보장 상품은 1.56%의 수익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잘 분산된 포트폴리오를 담은 펀드에 장기 투자하면 주가 폭락 위험도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고 반박한다. 펀드 평가회사인 KG제로인 연금연구소 김성일 소장은 “실적배당형 퇴직연금의 장기 수익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9월 30일 기준 순자산 30억 원 이상의 1년 이상 된 퇴직연금펀드 96개의 기간별 수익률을 분석한 결과 국내외 주식형 등 모든 유형의 펀드에서 운용 기간이 길수록 연평균 수익률이 증가했다는 설명이다. 그는 “(이를 근거로) 실적배당형 상품과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구분해서 퇴직연금 수익률을 발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생애주기 자산배분 상품에 관심 가져라

위험자산 비중을 높이겠다고 결심했다면 또다시 넘어야 할 산이 있다. 어떤 상품을 선택할지이다. 현재 국내에 출시된 퇴직연금펀드는 무려 1800여 개다. 일반인들이 이 상품을 모두 비교 분석한 뒤에 자신에게 맞는 상품을 선택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이 때문에 퇴직연금 가입자들 대부분은 금융기관 퇴직연금 담당자가 추천한 상품 가운데 최근 수익률이 가장 좋은 상품을 선택하는 방식을 택하기 일쑤다.

하지만 금융기관 직원들이 모두 전문가가 아닌 데다 과거 수익률이 미래를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투자 격언 중에 ‘이발사에게 이발할 때가 됐는지 물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회사에 속한 전문가들은 각자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믿어서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가입자들의 이 같은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선진국들이 도입한 투자제도가 ‘디폴트 옵션’이다. 금융상품을 잘 몰라 어떤 상품으로 퇴직연금을 운용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DC형 가입자들을 위해 사전에 등록돼 있는 자산배분형 상품으로 자동 운용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이다.

퇴직연금제도가 잘 발달한 미국에서는 디폴트 옵션 상품으로 ‘타깃데이트펀드(TDF)’가 인기를 끌고 있다. 가입자의 나이가 젊을 때는 위험자산 투자 비중을 높였다가 나이가 들수록 위험자산보다는 안전자산의 비중을 높여주는 식으로 자산 배분을 해주는 펀드다.

1993년 미국에서 처음 선보인 TDF는 2006년 연금보호법 제정 이후 디폴트 옵션 상품의 하나로 제시되면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펀드 평가회사 모닝스타코리아에 따르면 미국 TDF의 순자산 규모는 2008년 말 1583억 달러에서 2017년 말 1조 달러를 돌파(1조1076억 달러)했다. 지난해에는 주식시장 조정 등으로 자산규모는 1조865억 달러로 조금 줄었다.

한국에서는 2011년 미래에셋자산운용이 최초로 TDF 상품을 선보였다. 당시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삼성자산운용이 2016년 관련 상품을 내놓은 뒤 규모가 커지고 있다. 2011년 말 4900만 원에 불과하던 TDF 순자산 규모는 지난해 말 1조 원을 넘어섰다.

TDF가 큰 폭의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지만 보완해야 할 과제는 적잖다. 무엇보다 국내 TDF는 우리 자산운용사들이 외국 운용사들의 도움을 받아 출시했다. 당연히 외국 운용사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가입자가 떠안아야 한다. 따라서 운용 보수 등을 비교해보고 투자상품을 선택해야만 한다. 모닝스타코리아 정승혜 리서치담당 이사는 “TDF는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만큼 잠재력은 충분하지만 장기 운용 상품이라는 점을 고려해 투자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 인출형 상품에도 관심 가져라

지난해 퇴직연금 가입자 가운데 만 55세 이상이 돼 퇴직연금을 받기 시작한 사람은 29만6372명이다. 이 가운데 연금으로 수령한 가입자는 2.1%(6145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97.9%의 가입자는 일시불로 받아갔다. 이들의 평균 수령금액은 1597만 원. 현재의 퇴직연금 제도가 연금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못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만 퇴직연금 수령액 기준으로 보면 가능성을 볼 수 있다. 전체 수령액의 21.4%(1조2643억 원)가 연금으로 수령했고, 이들의 평균 수령금액은 2억575만 원이다. 적립금을 인출하는 단계에서는 금액이 클수록 연금으로 받아갔다는 뜻이다. 따라서 정책 당국이나 은행과 보험사 등 퇴직연금 사업자, 그리고 가입자 모두 적립금을 많이 불릴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연금으로 받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인출할 때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좁다. 현재 연금 수령자들은 대부분 매월 일정액을 받는 방법을 택한다. 문제는 은퇴 초창기에 많이 받다가 나이가 들수록 적게 받거나 반대로 초기에 적게 받다 갈수록 많이 받는 방식을 선호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재는 이런 선택을 하기 어려운 구조다.

은퇴 이후 적립금을 관리하는 개인형퇴직연금(IRP) 계좌에 편입할 상품도 거의 없다는 것도 문제다. 이 때문에 대부분 정기예금으로 운용하게 되고, 물가상승률을 밑도는 수익률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자본시장연구원 송홍선 펀드연금실장은 “앞으로 자산운용 업계에서 은퇴 이후 적립금을 인출하는 가입자들의 다양한 요구에 맞는 인출형 상품을 더 적극적으로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 확정급여(DB)형과 확정기여(DC)형 ::

2005년 12월 도입된 퇴직연금제도는 회사가 근로자에게 지급해야 할 퇴직급여를 회사 외부의 금융회사에 맡겨 운용하는 제도를 말한다. 회사가 도산해도 금융회사로부터 안정적으로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 확정급여(DB)형은 회사가 책임지고 운용한 후 정해진 퇴직금을 지급한다. 확정기여(DC)형은 회사가 매년 근로자 연봉의 12분의 1을 일정한 주기에 따라 근로자 퇴직연금 계좌에 넣어주면 근로자가 알아서 운용해야 한다.


▼ 선진국서 많이 채택하는 ‘디폴트 옵션’ 상품이란 ▼

미리 설계된 대로 투자… 객관적 지표 사용해 호평

선진국에서는 퇴직연금 운용 단계마다 다양한 디폴트 옵션 제도가 적용된다. 여기서 디폴트 옵션이란 연금 가입자가 선택하지 않으면 미리 설계된 프로그램에 따라 자동으로 선택이 이뤄지는 것을 말한다.

퇴직연금 적립금을 운용할 때 등장하는 디폴트 옵션 상품이 대표적이다. 퇴직연금 가입 단계에서도 디폴트 옵션은 나온다. 근로자가 퇴직연금에 가입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자동으로 가입하게 만든 프로그램이다. 은퇴 이후 퇴직연금을 받아갈 때에도 디폴트 옵션은 사용된다. 일시불로 받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자동으로 연금으로 받도록 하는 방식이다.

퇴직연금 적립금 운용 단계에서 선택하는 디폴트 옵션 상품으로는 미국의 TDF와 호주의 마이슈퍼가 대표적이다. 2014년 첫선을 보인 호주의 마이슈퍼 상품은 근로자들이 손쉽게 투자 상품을 선택할 수 있도록 객관적인 지표들을 사용해 호평을 받고 있다. 현재 마이슈퍼 상품으로 운용하는 퇴직연금 계좌는 전체의 58%인 1550만 개에 이른다.

퇴직연금 선진국에서는 가입자들이 대부분 디폴트 옵션 상품을 선택한다. 자본시장연구원 남재우 연구위원에 따르면 미국과 스웨덴의 경우 DC형에 가입한 근로자 가운데 각각 80%, 92%가 디폴트 옵션 상품으로 적립금을 운용하고 있다. 이는 퇴직연금 가입자들이 디폴트 옵션 상품을 전문가들이 잘 설계한 상품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반면 국내에서는 디폴트 옵션 도입이 더딘 편이다. 고용노동부가 지난해 국회에 제출한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에는 기금형 제도 도입은 포함돼 있지만 디폴트 옵션 도입은 빠져 있다. 퇴직연금 가입자가 디폴트 옵션 상품에 투자했다가 손실을 볼 경우 그에 따른 원망과 법적 책임 문제 등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기금형 제도와 디폴트 옵션은 동전의 양면인 만큼 디폴트 옵션 도입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고용부가 퇴직연금 수익률 제고를 위해 도입하기로 한 기금형 제도는 1개 또는 2개 이상의 회사가 수탁법인을 설립해 퇴직연금 자산을 신탁하고 전문가와 노사로 구성된 수탁법인 이사회에서 연금 운용 전략 등을 수립하게 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전문가가 참여함으로써 투자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조치다. 기금 간 퇴직연금 유치 경쟁을 통해 가입자의 만족도를 높이는 효과도 기대하고 있다는 게 고용부의 설명이다.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퇴직연금#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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