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다언은 ‘그 일’을 17년간 머릿속에서 무한반복 재생한다. 언니를 죽인 범인은 누구일까. 허점투성이 진술을 하고도 풀려난 한민우 같은데, 지금이라도 그를 찾아내 단죄할까. 상상 속 사건이 실감을 더할수록 의심과 자책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언니의 유령에 붙들린 다언의 마음 밭은 폐허가 되어 간다.
데뷔 24년 차 소설가 권여선(54)이 신작 장편 ‘레몬’(창비·1만3000원·사진)으로 돌아왔다. 2016년 계간 ‘창작과 비평’에 실린 중편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를 개작한 작품. 애도되지 못한 죽음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내면을 극한까지 파고든다. e메일로 만난 그는 “가까운 이의 죽음과 불행을 ‘나 때문’이라 생각하는 마음은 오만이다. 삶의 비정한 속성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슬픔을 극복할 수 있다”고 했다.
권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삶의 어두운 순간을 반추하게 된다. 억울함과 부당함, 지질함 같은 감정이 해일처럼 밀려와 빵 터지며 ‘불편한 카타르시스’를 남긴다. ‘레몬’은 지적인 통찰이 넘치는 ‘권여선표’ 소설에 스릴러를 가미했다.
“죽음을 다룬 미스터리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과 깊은 상실을 겪은 이들의 아픔을 그리고픈 마음이 만나 탄생한 이야기예요. ‘내 탓’은 가공의 비극을 더할 뿐, 절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메시지를 건네고 싶었습니다.”
데뷔작인 장편 ‘푸르른 틈새’(1996년)부터 단편집 ‘처녀치마’(2004년) ‘분홍리본의 시절’(2007년) ‘안녕 주정뱅이’(2016년)까지. 그의 소설만 찾아 읽는 독자가 적지 않다. 수치와 염치 중간쯤의 감정을 귀신같이 포착해 “딱 내 이야기”라고 느끼게 만드는 게 그의 장기. 굵직한 문학상을 다수 수상하며 중견 작가로 우뚝 섰다.
그의 요즘 관심사는 인간을 순식간에 탐욕으로 몰아넣는 일확천금에의 욕망. 그는 “평범한 이들도 눈앞의 이득 앞에서 쉽게 자신을 속이곤 한다”며 “부동산 광풍과 비트코인 열풍 같은 세태를 작품에 담고 싶다”고 했다. 그의 계획은 “순간의 단상들을 엮어 계속 쓰는 것”이다.
“작가로 살면서 나쁜 점은 글 쓸 때 미친 사람 비슷하게 되는데, 그걸 잘 달래면서 데려가야 한다는 점? 그 대신 글을 마치면 미친 사람 비슷하게 기뻐지기도 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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