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5일 처음 만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사실상 ‘비핵화 중재자’ 역할을 요청하면서 하노이 회담 이후 비핵화 협상 지형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주목된다. 특히 푸틴 대통령은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북한 체제를 보장해야 한다”면서 기존 6자회담 체계의 복원까지 주장했다. 지금까지 북-미에 한국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비핵화 협상에 중국에 이어 러시아까지 참여해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이 이날 김 위원장과 나눈 대화를 곧 미중에 전하겠다고 밝힌 만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향후 비핵화 협상의 키가 될 듯하다.
○ 푸틴 “힘 합치면 산도 옮길 수 있다” 개입 공식화
김 위원장은 이날 단독회담, 확대회담을 통해 5시간가량 푸틴 대통령과 비핵화 등 현안들을 논의했다. 김 위원장은 연회에서 “지역의 평화 안전 보장을 위한 문제들 그리고 공동의 국제적 문제들에 대해 허심탄회하고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략적이고 전통적인 조-러(북-러) 친선 관계를 새로운 높이에서 새 세기의 요구에 맞게 끊임없이 강화 발전시켜 나가는 것은 나의 확고부동한 입장이며 전략적 방침”이라고 밝혔다. 집권 후 첫 북-러 정상회담을 계기로 트럼프 행정부의 빅딜 압박을 피하면서 비핵화 협상의 주도권을 쥘 모멘텀을 만들어 보겠다는 것. 이에 푸틴 대통령은 “북한 속담에 ‘힘을 합치면 산도 옮길 수 있다’는 게 있다. 우리는 앞으로도 이를 통해서 성공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북-러 공조 방향은 이후 열린 푸틴 대통령의 단독 기자회견에서 구체화됐다. 푸틴 대통령은 “북한도 비핵화를 원하고 있으며 체제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면서 “북한의 체제 보장에 대해 논의할 땐 6자회담 체계가 가동돼야 한다. 이것은 북한의 국익에 부합하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한국과 미국의 보장 메커니즘은 충분치 않을 것”이라며 “북한에 있어선 다자 안보 협력 체제가 필요할 것이라고 본다”고 했다. 김 위원장이 올해 신년사에서 밝혔던 ‘평화체제 논의를 위한 다자협상’ 구상에 직접 호응한 것이다.
그러면서 푸틴 대통령은 ‘비핵화 중재자’를 요청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김 위원장이 직접 북한 측의 입장을 미국 행정부와 다른 정상들에게 알릴 것을 희망했다”면서 “내일(26일)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얘기할 것이고 미국 행정부에도 오늘 회담 결과에 대해 말할 것”이라고 했다.
○ ‘6자회담’은 북의 또 다른 판 흔들기
김 위원장이 이날 직접 비핵화 다자논의 해법 구상을 푸틴 대통령에게 밝혔는지는 불분명하다. 비핵화 판도에 개입하려는 러시아의 강한 의지가 섞였을 수도 있다. 다자논의가 되면 비핵화 협상 타결에 시간이 걸려 북한이 원하는 제재 해제는 더 늦춰질 수도 있다. 그렇기에 김 위원장도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과의 친밀감을 강조하며 ‘톱다운식 해결’을 선호해 왔다. 게다가 6자회담은 2005년 ‘9·19공동성명’과 후속 합의들을 도출하기도 했지만, 결국 핵시설 검증 및 시찰 방법에 대한 관계국들의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실패로 끝난 협상 프로세스다.
한 외교 소식통은 “김 위원장이 하노이 노딜 이후에 미국이 ‘빅딜’ 기조를 두 달 가까이 유지하자 북-러 정상회담, 6자회담 카드를 흔들며 틈을 노리는 것”이라고 했다.
이날 회담에 대해 AFP통신은 “푸틴 대통령은 북한을 압박하는 워싱턴에 은근한 한 방을 먹였다”고 평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날 회담으로 김정은 위원장이 국내에서 이미지를 개선할 수 있게 됐다”며 “외교적으로 고립되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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