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정은]백악관의 수난 통해 본 대통령 대변인의 역할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4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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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한미 정상회담이 열렸던 11일 백악관 브리핑룸은 썰렁했다. 뒤편에서 장비를 손질하는 방송카메라 기자와 노트북으로 유튜브 영상을 보는 기자 몇 명만이 눈에 띄었다. ‘파리라도 날아들어 올 분위기군…’이라고 말할 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유모차를 미는 한 여성이 들어왔다. 출입증이 달린 목줄에 미국 주요 방송사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동료 몇 사람이 유모차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귀엽다”는 호들갑 속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출산휴가를 내고 떠났던 여기자가 아기를 데리고 돌아온 것이었다. 전 세계의 주요 정책 이슈들이 다뤄지고 취재진의 송곳 질문이 쏟아지는 이 삼엄한 장소에 어린 아기라니…. 이런 게 미국식 모성(母性) 보호인가 싶어서 부럽다가 문득 긴장감이 사라진 브리핑룸의 분위기가 불편해졌다.

백악관에서 대변인 언론 브리핑이 사라진 지 오래다. 백악관 출입기자들의 계산에 따르면 세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은 27일(현지 시간)로 47일째 브리핑을 하지 않았다. 앞서 42일 만에 브리핑하면서 최장이라고 했던 기록을 이번에 또 갈아 치웠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서 “브리핑에는 신경 쓰지 말라”고 대놓고 이야기했던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브리핑룸에서 만난 한 외신기자는 “언론 브리핑은 이제 기대하지도 않는다”며 “그래도 여기 앉아 있는 이유는 백악관 마당을 지나다니는 당국자들을 붙잡고 질문이라도 해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브리핑을 안 한 것뿐 아니라 더 큰 문제도 나왔다. 샌더스 대변인은 최근 기자들에게 거짓 브리핑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사임 압력까지 받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임스 코미 연방수사국(FBI) 국장의 사임 압력을 넣었다는 의혹이 터졌을 당시 그는 “수많은 FBI 요원들이 코미 국장을 불신하고 있으며, 그의 사임에 찬성한다”고 브리핑했다. 하지만 그 내용에 근거가 없었다는 게 로버트 뮬러 특검의 보고서를 통해 뒤늦게 밝혀졌다.

그는 이 브리핑 내용에 의문을 제기한 기자들이 “수많은 요원들이란 게 누구냐, 직접 접촉한 것이냐”고 묻자 “전화도 하고 이메일도 하고 여러 경로를 통해…”라고 브리핑에서 둘러댔다가 거짓말을 위한 거짓말을 이어갔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기자들은 “신뢰도가 생명인 대변인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게임 끝’이라는 이야기”라며 그에게 물러나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이런 가운데도 트럼프 대통령은 직접 트위터를 날리면서 하고 싶은 말만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정제되지 않은 대통령의 돌출발언까지 그대로 노출된다는 점에서 정책 소통 과정을 혼란스럽게 만들 위험을 안고 있다. 외교안보 참모 해임도 트위터로 통보하는 등 워싱턴을 경악시키거나 참모진을 우왕좌왕하게 만든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대통령으로, 또 그의 입에 해당하는 대변인으로 인해 망가진 백악관 브리핑 시스템이 주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대통령의 말과 생각은 갖춰진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통해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자주 전달해야 한다는 것. 언론 비판에 직면한 보스를 감싸기 위해 팩트를 왜곡하는 과잉 충성을 피해야 한다는 것. 대통령의 국정 방향을 제대로 접하는 것은 국민의 당연한 권리다.

이정은 워싱턴 특파원 lightee@donga.com
#백악관#백악관 대변인#대통령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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