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벌) 정부의 수장은 청나라가 멸망한 뒤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봉건 전제정치를 계속했습니다. 이런 정부가 주권을 팔아먹었어요. 5·4운동은 (외세에) 주권을 넘기지 말라는 반(反)제국주의 운동이자, (봉건적) 정부를 반대한 반봉건 애국운동이었습니다.”
중국의 5·4운동 100주년을 이틀 앞둔 2일 오전. 100주년 기념 전시인 ‘5·4현장’이 열린 베이징(北京)신문화운동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은 톈안먼(天安門) 인근 옛 베이징대 건물인 베이다훙러우(北大紅樓)에 있다. 이곳에서는 5·4운동 사진 180여 장과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따가운 햇살로 무더웠던 이날 기념관은 매우 붐볐다. 이곳에서 기자와 만난 런(任)모 씨(50)는 “5·4운동은 민주주의와 독립을 각성시켰다. 학생들이 민중에 이런 의식을 일깨웠다”고 말했다. 산시(山西)성에 사는 그는 대학생 아들과 함께 기념관을 찾았다.
○ “구시대적 정부에 항거한 구국운동”
1915년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는 일본과 타협해 독일이 확보했던 산둥(山東)반도의 이권 이양 등 일본의 권한을 대폭 허용하는 21개 조항을 수용했다. 1919년 1월 파리평화회의에서 산둥반도를 아예 일본에 넘기기로 결정하자 같은 해 5월 4일 베이징 대학생 등 3000여 명이 톈안먼 일대에서 반대 시위를 벌였다. 5·4운동의 시작이었다. 5·4운동은 주권을 위협하는 외세와 이들과 결탁한 정부에 저항하는 정치운동으로 민주주의와 자유 등 새로운 사상을 일깨운 신(新)문화운동이었다. 당시 군벌정부는 학생들을 탄압했다.
‘5·4현장’ 전시실에는 1919년 6월 11일 베이징시민선언과 관련된 복제 물품도 있었다. 선언은 △대일 외교에서 산둥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지 말고 일본과 1915∼1918년 맺은 모든 밀약을 취소하라 △책임 있는 관료들을 퇴진시키고 베이징에서 추방하라 △베이징 군경 사령부를 없애라 △베이징 보안대를 시민 조직으로 바꿔라 △시민은 절대적인 집회와 언론 자유권을 가진다 등 5개 요구사항을 내세웠다. 런 씨의 말처럼 5·4운동은 국민의 주권을 팔아넘기면서 국민의 자유를 탄압한 정부에 대한 본격적인 항거였다.
전시는 5·4운동의 시발점인 5월 4일 시위에 대해 “(당시 군벌) 정부에 (일본과의) 조약을 체결하지 말라고 요구하던 분노는 일본과 밀약에 서명한 내각과 외교관으로 향했다”고 설명했다. 1919년 6월 많은 베이징 학생들이 거리에서 연설했고 정부는 군경을 동원해 학생 약 1000명을 체포했다.
초등학생 딸과 함께 기념관을 찾은 상하이(上海) 거주자인 리징(李靜·39) 씨는 “오랫동안 쌓여온 민중의 분노가 폭발한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징의 한 초등학교 교사인 리(黎)모 씨(40)는 “청년들이 민중을 자각시켜 생사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한 애국주의 정신”이라고 평가했다.
○ 시진핑 “공산당에 복종하는 애당 애국주의”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달 3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5·4운동 10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5·4운동의 핵심으로 ‘애국주의 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1시간 이상의 기념 연설 중 애국을 18번이나 강조하며 5·4운동이 애국운동이었다고 콕 집어서 강조했다.
하지만 전시를 찾은 중국 시민들이 5·4운동의 정신으로 거론하던 ‘애국’과는 뉘앙스가 달랐다. 시 주석은 ‘공산당에 복종하는 애국’을 강조했다. 그는 “신시대 중국 청년은 (공산)당의 말을 따라야 하고 당을 따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애국하지 않고 조국을 속이고 배반하면 국가와 세계에 매우 창피한 일이고 발붙일 곳이 없게 된다”며 “모든 중국인에게 애국은 본분이고 책임”이라고도 했다. 시 주석은 “신시대 중국 청년에게 조국을 열렬히 사랑하는 것은 입신의 본분”이라며 “애국주의의 본질은 애국과 애당을 견지하는 것이며 고도로 통일된 사회주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기념식에는 어린 학생들을 포함해 3000여 명이 참석했다.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는 등의 노래도 제창했다. 기념식장에는 ‘시진핑 동지를 핵심으로 하는 당 중앙 주변에서 긴밀히 단결하자’는 붉은색 대형 현수막이 붙었다. 익명을 요구한 중국인 학자는 본보에 “5·4운동은 낡은 군벌과 정부답지 않은 정부로 인해 빠진 도탄으로부터 국가를 구해 인민이 진정한 주인이 되는 애국이었다”고 지적했다.
5·4운동 정신에는 항일운동의 성격도 있었지만 시 주석은 연설에서 일본에 대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미중 패권 경쟁에서 미국의 동맹인 일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중일 관계를 개선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상황이어서 시 주석이 의도적으로 이를 거론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 반정부 학생운동 의미 축소
시 주석은 5·4운동에 대해 “청년 지식인이 선봉에 섰다”고 평가하면서도 현재 중국 청년들에게는 ‘당에 대한 복종’을 강조했다. 5·4운동이 가진 반(反)정부 학생시위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다음 달은 1989년 6월 4일에 일어난 톈안먼(天安門) 시위 30주년이다. 5·4운동 100주년과 톈안먼 시위 30주년이 겹치면서 이를 기념하는 시위가 벌어질 가능성을 중국 정부가 차단하려고 총력을 다한다는 관측이 많다. 이 때문에 5·4운동 100주년이지만 대대적인 행사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도 나온다.
2일 찾은 기념관의 또 다른 전시관에는 1919년 5월 4일 베이징대 등 13개 대학 학생들이 톈안먼에서 집회를 한 뒤 남쪽의 첸먼(前門)을 거쳐 톈안먼이 있는 구공(古宮·자금성) 동쪽의 차오루린(曹汝霖) 당시 군벌 정부 외교차장의 집으로 행진한 경로가 공개돼 있었다. 당시 분노에 찬 학생들은 일본에 각종 권리를 팔아넘긴 매국노로 지목된 차오루린의 집을 불태워 버렸다.
베이징시 정부는 1∼4일 1호선 톈안먼 동역∼톈안먼 서역 구간과 2호선 첸먼 역을 임시 폐쇄했다. 3개 역을 일직선으로 이으면 톈안먼과 톈안먼 광장을 둘러싼다. 베이징시는 3개 역을 폐쇄한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중국 정부가 1일 노동절 휴무를 하루에서 갑자기 4일로 연장한 게 바로 5·4운동 100주년과 톈안먼 시위 30주년 집회를 사전에 막기 위한 조치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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