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진주 기생독립단 활약 분명하지만 호적-재판기록 등 자료 모두 소실”
매국노 구애 거절한 항일기생 ‘산홍’ 진주문화원, 정부포상 재청구 추진
“기생들은 화류계 여자라기보다 독립투사였다.”
1919년 9월 부임한 일제의 치안 책임자 지바 료는 ‘조선독립운동비화’라는 책에서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독립사상을 불러일으키는 기생들이 있는 한 조선의 치안 유지가 힘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실제로 3·1운동 당시 ‘애국 기생’들이 전국 각지에서 맹활약했다. 특히 경기 수원, 경남 통영, 진주가 대표적인 곳들이었다. 수원에선 김향화가, 통영에선 정막래와 이소선이 주도했다. 일부 기록에는 김향화와 한금화가 진주 기생독립단 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소개돼 있지만 정확한 기록은 아니라는 평가가 많다. 진주 기생독립단과 걸인독립단의 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주최해온 사단법인 진주문화사랑모임 강동욱 상임이사는 “김향화는 수원 기생이고, 한금화도 진주 기생이 아니다”라며 “진주에서 기생독립단이 활약한 것은 분명하지만 아쉽게도 누가 이끌었는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수원의 김향화와 통영의 정막래, 이소선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사실이 서류로 확인돼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만세시위 도중 체포된 진주 기생 6명이 징역형을 받았다는 기록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추경화 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실장은 “광복 직후 폭동과 6·25전쟁 때 화재로 진주법원과 진주시청의 호적과 재판 기록이 모두 사라졌다”며 “대구복심법원(당시의 2심 법원) 자료는 80∼90%가 남아 있지만 진주재판소에서 끝난 사건 자료는 대부분 소실됐다”고 전했다.
3·1운동보다 앞선 시기에 활동한 진주 출신 항일기생으로는 산홍이 유명하다. 황현이 지은 ‘매천야록’에 따르면 을사오적(구한말 을사조약 체결에 가담한 다섯 매국노)의 한 사람인 이지용이 1906년 진주에서 산홍을 보고 마음을 빼앗겨 천금을 내놓고 첩이 돼 달라고 했다. 이에 산홍은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오적의 우두머리라고 한다.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역적의 첩이 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한다. 이지용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거금을 제시하거나 협박을 통해 자신의 첩이 될 것을 거듭 요구했고, 이를 견디지 못한 산홍은 자결했다고 유학자 양회갑은 시문집 정재집을 통해 전했다.
2016년 산홍의 정부 포상을 신청했던 추경화 실장은 “산홍은 친일 인사와 투쟁하다가 자살했기 때문에 훈포장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며 “현 정부가 독립유공자를 확대하겠다고 하니 시민들의 서명을 받아 재심을 청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논개의 공덕을 기리는 진주성 내 사당 의기사에는 산홍이 지은 시(‘의기사감음’)가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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