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 휴교, 상인들은 철시… 섬 곳곳서 함성-봉화 피어올라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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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55화> 인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인천 계양구 황어장터기념탑 앞에서 열린 제1회 황어장터 만세운동 재현 행사에서 청소년들이 기념 공연을 펼치고 있다. 황어장터 만세시위는 인천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이다. 인천 계양구 제공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인천 계양구 황어장터기념탑 앞에서 열린 제1회 황어장터 만세운동 재현 행사에서 청소년들이 기념 공연을 펼치고 있다. 황어장터 만세시위는 인천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이다. 인천 계양구 제공
3일 방문한 인천 동구 창영초등학교엔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옛 교사인 붉은 벽돌 건물 앞에는 땅따먹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1907년 세워진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이자, 메이저리그 야구선수 류현진의 모교로 유명한 곳이다.

인천시는 이곳에서 올해 3월 1일 ‘100주년 3·1절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행사에선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제막식과 타임캡슐 매설식이 진행됐다. 시민 100명이 편지와 사진 등 저마다의 의미 있는 물건을 담은 타임캡슐은 50년 뒤인 150주년 3·1절 기념식에 개봉될 예정이다.

100주년 3·1절 기념행사가 창영초등학교에서 열린 것은 이곳이 인천 3·1운동의 발상지라는 역사적인 의미가 깃든 곳이기 때문이다. 100년 전 3월 6일 인천공립보통학교 3학년 김명진 등 학생들이 휴교를 주동한 것이 인천 3·1운동의 시작이었다.

○ 만세운동에 나선 초등학생들


‘초등학생들이 만세운동에 나섰다’는 말을 듣는다면 요즘 기준에선 갸우뚱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근대 문물의 유입과 함께 세워진 보통학교에는 나이 많은 학생들이 적잖았다. 조혼으로 가정을 이룬 가장들도 학교를 다녔다. 서울에서 들려온 3·1만세운동 소식은 이들 청년 학생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인천은 부산과 원산에 이은 개항장이며 서울과 이어지는 한국 최초의 철도 경인선이 놓인 곳이다. 일찍이 일본영사관과 은행, 교회, 학교 등이 설립됐고 3·1운동 당시 인천부(지금의 시) 인구 2만211명 중 44.4%인 8973명이 일본인이었을 만큼 일제의 식민지 지배 과정에서 중요한 거점도시였다.(김정인·이정은,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일제의 지배력이 절대적이었기에 인천의 3·1운동이 일어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1919년 3월 6일 공립보통학교가 공립상업학교(현재 인천고) 학생들과 함께 동맹휴학에 나선 것은 닷새 전 일어난 서울의 3·1운동으로 인해 일본 경찰의 경계가 삼엄했던 중에 단행한 일대 사건이었다.

인천 창영초등학교(옛 인천공립보통학교)에 세워진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인천 창영초등학교(옛 인천공립보통학교)에 세워진 3·1운동 100주년 기념비.
3월 8일 오후 9시 공립보통학교 3학년 학생으로 당시 19세였던 김명진이 학교로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갔다. 같은 학교 학생이던 18세 박철준이 밖에서 망을 보고 있었다. 김명진은 미리 준비한 절단용 가위를 이용해 경찰서로 통하는 학교의 전화선을 자르고 수화기를 박살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3·1운동사’) 학교 교직원들이 동맹휴학 상황을 경찰에 보고하는 데 분개해 치른 거사였다. 이 사건으로 가택 침입 및 전신법 위반 혐의 등으로 붙잡힌 김명진은 경찰을 향해 “내 나라 독립을 위해 한 점도 부끄럽지 않다”고 외쳤다.

공립보통학교의 휴학은 일주일 넘게 계속됐다. 경찰이 학부모회의를 소집해 주모자 25명을 처벌하겠다는 강경책을 발표하자 학생들은 3월 14일 어쩔 수 없이 휴학을 접고 학교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전교생 405명 중 85명이 결석해 저항의식을 숨기지 않았다.

공립보통학교의 휴학은 만세운동에 대한 시민들의 의지를 일깨웠다. 3월 9일 아침 50여 명이 경인가도에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고 이내 군중이 수백 명으로 불어났다. 이날 오후 5시에는 교회 청년들과 학생들이 만국공원에 모여 시위를 벌이다가 경찰에 강제로 해산당하기도 했다. 다음 날 시내 중심가에서 시민과 학생 20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하다가 경찰의 출동으로 8명이 구속됐다.

강옥엽 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전문위원은 인천 만세운동의 특징 중 하나로 철시(撤市)를 꼽는다. 실제로 ‘한국독립운동사’에는 잇단 철시 상황이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인천 각지에서 만세 시위가 한창이던 3월 27일 조선인 가게에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격문과 함께 지하신문인 ‘조선독립신문’이 날아 들어왔다. ‘만세를 불러라, 철시하라’는 내용이었다. 사흘 뒤인 3월 30일부터 상인들은 철시를 시작하며 일제에 대한 항쟁을 벌였다. 일본인 부윤이 경찰서에 연락해 상점을 개점하도록 협박하면 눈가림으로 문을 열었다가도 곧 닫는 식으로 저항을 계속했다.

일제의 압박에 못 이겨 개점하는 일부 상인들은 시민들의 강력한 경고에 부딪쳤다. 잠깐 철시했다 문을 연 우각리(현재 동구 금창동) 17개 점포에 4월 1일 경고문이 날아들기도 했다. ‘철시하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을 쓰겠다’는 내용으로 내리(현재 중구 내동) 주민 김삼수와 임갑득이 작성한 것이었다. 그래도 상점 몇 곳이 영업을 계속하자 김삼수와 임갑득은 다시 경고문을 만들었다. ‘인천에 있는 상업가 여러분이 철시하지 않으면 인천시가는 초토화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한국독립운동사’는 ‘초토화한다 하니 이는 인천시가를 불바다로 만든다는 것인데 이 대담한 경고문장을 내리에 있는 수 명의 점포에 (4월 2일) 집어넣었다’고 기록했다. 그래도 상점이 문을 닫지 않자 김삼수는 ‘최후의 통첩’이라는 제목으로 ‘속히 철시하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을 취하겠다’는 경고문을 작성한다. 이 경고문을 점포에 넣으려다가 일제 경찰에 발각돼 붙잡혔지만, 세 차례에 걸친 김삼수의 격렬한 경고문들은 그만큼 철시 투쟁이 강경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철시 항쟁으로 ‘조선인 상점이 거의 문을 닫아 쓸쓸한 거리가 되어 갔으며 무기미한 분위기가 돌고 있었다.’(‘한국독립운동사’)

인천은 섬이 많은 곳이다. 100년 전 섬 곳곳에서도 만세 함성이 울려 퍼졌다. 강화도에서는 삼산면(3월 10일), 강화읍내(3월 18일), 갈산면(3월 19일) 등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고 3월 27일엔 강화 전체 9개 지역에서 대규모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4월 9일 덕적도 명덕학교 운동회 때 교사 임용우 등이 주도해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부른 시위는 인근 문갑도와 울도까지 영향을 미쳐 이들 섬에도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 황어장터에서 울려 퍼진 “독립만세”의 함성

황어장터는 인천 계양구 장기리(당시 부천군 계양면 장기리)에 위치한 시장으로, 3일장과 8일장이 정기적으로 열리는 곳이었다. 소가 주된 거래 품목이었던 이곳에는 장날이면 1000여 명의 장꾼들이 모여들었고 500∼600마리의 소가 거래됐다. 우시장의 특성상 일반 장보다 타 지역 장꾼들이 더 많이 모일 수 있었기에, 3·1운동의 특성 중 하나인 공개성과 집합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장소였다.(양윤모 ‘인천에서의 3·1독립운동과 한성임시정부 수립’)

이곳에서 인천 지역 최대 규모의 만세운동이 전개된 것은 1919년 3월 24일이었다. 오후 2시 계양면 오류리 주민 심혁성(1888∼1958)을 비롯한 두세 명이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만세를 불렀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천도교인으로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심혁성이 천도교 본부 손병희와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한다.(‘경기지역 3·1독립운동사’) 실제로 천도교는 문학동과 평화동, 월미도 시위 등 인천 지역 만세운동에 관여했다.(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회, ‘인천의 역사와 문화’)

심혁성은 곧 경찰에 붙잡혔지만 시위대는 거세게 반발했다. 주민들은 순사를 향해 “심혁성을 풀어달라”고 소리쳤다. 매약상 임성춘이 200여 명 군중들에게 “자! 가거라, 가거라” 하고 외치면서 기세를 돋웠다. 군중들은 “붙잡아라, 붙잡아라”라고 외치거나 “심혁성을 내놓아라”라고 소리치면서 순사들을 포위했고 심혁성을 묶은 포승을 풀었다.

이때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순사들이 칼을 빼어 군중 속 주민 이은선을 칼로 찌른 것이다. 이은선은 그 자리에서 순절했고, 주민들은 심혁성을 그대로 두고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시위대의 기세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이은선의 육촌 이담이 거적에 싸인 채 면사무소에 방치된 이은선의 시체를 옮겨 매장했다. 그는 그날 밤 면내 각 동리에 통문을 돌렸다. ‘죽은 사람에게 동정하는 자는 집합하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소식을 접한 주민 200여 명이 계양면사무소 앞에 모였다. 면사무소를 습격한 군중들은 민적부와 조선인거주 등록부, 과세호수대장 등 일제의 조선인 통치와 관련된 서류들을 불살랐다. 다음 날 오전 11시 300여 명이 다시 면사무소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를 만큼 계양 주민들은 만세운동에 적극적이었다. 40여 명이 체포됐고 심혁성, 이담, 임성춘 등 중심인물들은 그해 10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았다.

박환 수원대 교수는 황어장터 독립만세 운동의 가장 큰 의미로 영향력을 꼽는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을 통해 서울과 김포지역 만세운동의 여파를 부평과 인천에 전파했고, 그 결과 연달아 시위가 일어나고 상가 철시운동이 전개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박 교수는 “경기 서부지역 전체의 만세운동을 이끄는 선구적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인천=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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