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고기정]제주 녹지병원이 남긴 것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5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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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유치부터 허가취소까지 공정했나
외국인들 “정권 바뀌면 또 정책 바뀌나”

고기정 경제부장
고기정 경제부장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까지도 중국의 패권적 실체를 몰랐을 것이다. 2년 전 중국이 롯데를 괴롭힌 방식은 치졸하고 그악스러웠다. 중국 당국은 롯데가 한국 정부와 사드 부지 계약을 맺은 지 나흘 만에 중국 내 롯데마트 4곳에 들이닥쳐 ‘소방시설 미비’를 이유로 영업정지 처분을 내렸다. 이후 한 달도 못 돼 99개 매장 중 87곳이 셔터를 내려야 했다. 영업정지가 언제 끝날지 기약조차 없었다. 롯데로선 더 아팠던 게 관변언론에서 불매운동까지 조장해 그룹 이미지를 바닥으로 추락시켜 놓은 것이었다고 한다. 2010년 경제 규모에서 일본을 추월해 주요 2개국(G2) 반열에 오르자, ‘대국(大國)’ 운운하며 동아시아의 맹주 노릇을 하려던 중국의 소아적 행태를 확인할 수 있었던 때였다.

중국의 실체는 2012년 일본과 센카쿠 충돌이 발생했을 때도 감지되긴 했다. 당시 공안들은 반일 시위대가 일본음식점 유리창을 부수고 일제 차량을 뒤집는 것을 방조하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그때는 중국이 역내 질서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특정국을 상대로 제한적이고 예외적인 폭력을 행사했다는 해석이 있었다. 하지만 사드 보복에서 드러난 중국은 자국의 이익이 조금이라도 훼손되면 상대가 누구든 정상적인 계약관계까지 모두 부정할 수 있는 나라임을 확인시켜 줬다. 국제경제 체제에서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런 중국보다 신뢰할 수 있는 나라일까. 얼마 전 중국 자본이 투자한 투자개방형 병원인 제주 녹지국제병원이 문도 못 열어보고 사업을 접었다. 투자개방형 병원이 의료 공공성을 훼손한다는 논란 때문이었다. 제주의 병상 47개짜리 병원이 건강보험 체계를 무너뜨릴 수 있느냐는 차치하고, 논의의 흐름과 정책 결정 과정이 상당히 거칠었다.

녹지병원의 주인인 중국 뤼디(綠地)그룹은 애초부터 병원을 할 생각이 없었다. 국토교통부 산하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가 제주에 조성하는 헬스케어타운에서 본업인 부동산·레저 사업을 할 요량이었다. 그런데 JDC가 병원도 지으라고 요구해 등 떠밀리듯 손을 댔다. 원희룡 제주지사와 JDC가 나서 보건복지부 허가도 쉽게 났다. 국내 1호 투자개방형 병원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됐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지난해 복지부 적폐청산TF(조직문화 및 제도개선위원회)는 투자개방형 병원 정책을 폐기하라고 박능후 장관에게 요구했다. 이런 기류에서 일부 시민단체가 이미 개원허가 신청 절차에 들어간 녹지병원에 반대하자 제주도는 이 건을 ‘숙의형 공론조사위’에 맡겨 버렸다. 조사위는 개설 불허 권고를 내렸는데 제주도는 다시 이를 ‘내국인 진료 제한’이라는 조건부 허가로 바꿨다.

뤼디그룹은 결국 허가 취소를 받은 뒤 지난달 말 사업 철회를 선언했다. 정작 사업이 망가지고 나자 제주도가 제3자 매각을 주선하려 해도 환자들의 접근성이 떨어지고 규모가 작다 보니 투자가치가 낮아 새 주인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녹지병원이 유령 건물이 될 거라는 말이 도는 이유다.

과거 정부에서 고위직으로 있다가 지금은 로펌에 몸담고 있는 한 퇴직 관료가 해준 말이다. “주로 하는 일이 외국인들에게 정부 정책을 설명하고 투자 환경을 소개하는 것인데, 브리핑이 끝나면 ‘정권이 바뀌어도 이 정책이 그대로 살아 있을 것 같으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관료로 있을 땐 몰랐는데, 외부에서 우리를 이렇게 보고 있다는 걸 접할 때마다 당혹스럽다.”

녹지병원 좌초로 의료 공공성을 지켰는지는 모르지만 국가 신뢰성에는 또 하나의 의문을 남긴 듯하다.

고기정 경제부장 koh@donga.com
#제주 녹지병원#사드보복#투자개방형 병원#적폐청산t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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