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통로로 물질 교환이 일어났으며 권력 관계가 조성되었고 결국에는 어느 한편이나 쌍방의 착취로 관계가 종료되기까지 끊임없이 성실과 근면을 강요받았다.’
유명 문예지의 ‘젊은 작가상’을 여러 번 받은 김금희의 지난해 베스트셀러 소설 ‘경애의 마음’ 속 남자 주인공 공상수는 이렇게 냉소적으로 연애를 정의한다. 비(非)출산과 비혼에 이어 비연애가 등장한 세태를 엿볼 수 있다.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뜻의 비연애는 비혼처럼 페미니즘 진영에서 기존 남녀관계에 대한 일종의 저항으로 시작됐으나 요즘은 남녀 가릴 것 없는 현상이 됐다.
▷미국 CNN 온라인판이 11일 “한국 청년들이 경제난과 청년실업, 성범죄에 대한 공포 때문에 연애를 기피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20∼44세 한국의 미혼 남성 중 26%, 미혼 여성의 32%만이 연애를 한다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KIHASA) 조사를 인용했다. 가난한 청년들이 연애 파업 중이라는 것이다. 청년들은 데이트 1회당 평균 6만 원인 비용이 부담돼 연애를 하기 어렵다고 인터뷰했는데 엄살만은 아닌 것 같다. 동아일보가 핀테크 기업 ‘핀크’ 회원 중 1990년대생 월급 생활자의 평균 급여를 추출했더니 월 148만 원이었다.
▷가장 안전하고 사적인 공간인 이불 안도 위험했다. 최근 케이팝 스타들의 단톡방에서 벌어진 성범죄를 보며 여성들은 우리 사회에 불법 촬영이나 동영상 유포가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를 깨달았다. 가장 친밀한 연인과의 사랑 행위가 몰래 촬영되는 것은 아닌지 여성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여성가족부의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 통계를 보면, 불법 촬영 피해의 65%는 전 배우자나 연인 등 아는 사람이 저질렀다. 이렇다 보니 ‘비싸고 위험한 연애’를 직접 하는 대신에 대중문화로 연애를 소비하는 현상도 나타난다. 저출산이 고착되면서 TV에서 육아 관찰 프로그램이 한창 인기를 끌었듯이 연애 파업이 일반화되면서 남의 연애를 관찰하는 TV 프로그램이 늘어났다.
▷‘데이트 비용이 없어서’ ‘취업 준비로 바빠서’ 등 사랑하지 않을 이유 100가지를 열거하고 나서도 사랑에 빠지는 것이 인간이다. ‘경애의 마음’ 속 상수도 결국 사랑에 빠지고야 만다. 그런데 연애하는 청년의 비율이 실제로 낮다면, 자발적으로 ‘연애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연애할 수 없어서’라고 보는 것이 맞다. 비록 지금 가난한 연인일지라도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릴 것이라고 확신한다면 연애 본능을 포기하지는 않을 터다. 청년들이 연애 파업을 하는 나라, 그건 ‘미래가 없다’는 선언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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