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3일 오전 서울 김포공항 화물청사에 위치한 한국공항공사 항공훈련센터. 캡슐 모양의 ‘시뮬레이터’로 들어가니 실제 조종석과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조종사들이 비행훈련을 할 수 있도록 마련한 곳이다. 조종석에 앉은 제주항공 백승길 기장(48)과 주정목 기장(49)이 이륙 모드로 운항을 시작하자 실제 비행기가 날아오르는 것처럼 뜨는 느낌이 들었다.
조종 경력만 20년이 훌쩍 넘는 이들의 이날 비행에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조금이라도 연료 사용량을 줄여 이산화탄소를 적게 배출하기 위한 ‘친환경 운항법’을 공유하는 비행이었다. 이들은 탄소저감 운항방법을 공유하고 실천하는 제주항공 조종사들의 모임인 ‘북극곰 살리기 프로젝트’ 회원이다.
2017년 프로젝트를 만든 황상영 기장(49)은 “자동차 운전 습관에 따라 연료소비효율이 달라지듯 비행기도 운항 습관을 조금만 바꾸면 30년 된 소나무 여러 그루를 심는 듯한 이산화탄소 저감 효과가 난다”고 말했다. 이정광 기장(59)은 “요즘은 하늘에 빽빽이 ‘벌떼’처럼 항공기가 들어서 있다. 각각 수백 드럼(1드럼 200L)의 기름을 실었다고 보면 어마어마한 양”이라며 “조종사가 생각을 바꾸면 조금이라도 연료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 기장들의 친환경 운항 모임 결성
항공훈련센터에서 주 기장과 백 기장이 선보인 ‘플랩스 1 테이크오프’도 대표적인 탄소저감 운항방법으로 꼽힌다. 플랩스는 비행기의 양력(날아오르는 힘)을 높여주는 장치다.
주 기장은 “보통 조종사들이 이륙할 때 많이 쓰는 ‘플랩스 5’보다 얕은 각도인 ‘플랩스 1’을 사용하면 항력(항공기가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방해하는 힘)이 줄어 이륙할 때 소모되는 연료량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플랩스 1 테이크오프를 한 차례 시도할 때마다 연료는 30kg 덜 쓰고, 탄소배출량은 95kg 줄일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사실 연료 절감을 외치지 않는 항공사는 없다. 이는 곧 비용 절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항공업계는 운항의 안전성, 정시성, 쾌적성, 경제성 등 4가지 원칙을 강조한다. 승객들이 안전하게, 정확한 시간에 맞춰, 쾌적한 비행을 하도록 하고 민간항공사로서 연료 절감 운항도 해야 한다는 의미다.
황 기장이 2014년 운항 효율을 위한 일종의 태스크포스(TF) 리더를 맡았을 때에는 경제성에 초점을 맞춰 운항방법을 연구하고 캠페인을 벌였다. 하지만 조종사마다 고유의 운항 패턴이 있는데, ‘비용 절감’은 조종사들의 운항 습관을 바꾸게 하는 동기 부여로 부족했다.
그는 “연료 절감은 비용 절감이라는 경제적 가치와 탄소배출 저감이라는 사회적 가치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며 “환경문제가 심각해지는데 차라리 탄소배출 저감에 초점을 맞추고, 아낀 비용은 우리 사회를 위해 기부하는 것은 어떨까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황 기장의 생각은 들어맞았다. 2017년 4월 ‘탄소저감 운항 기장 모임’ TF가 생겼고, 5월부터 기장을 대상으로 지원을 받았다. 처음엔 25명이 모였다. 이들에게는 탄소저감 운항방법 리스트와 ‘그린 크루(Green Crew)’ 배지를 나눠줬다. 회사 운항품질팀은 그린 크루로 자원한 기장들이 매달 얼마나 탄소배출을 줄였는지 꼼꼼히 데이터로 만들어 보냈다. 연료 절감으로 아낀 비용을 서울대 행복연구센터에 기부하기 시작했다. 참여하고 싶다는 기장이 늘어 올해 4월에는 전체 기장의 절반 수준인 126명까지 불어났다. 첫 1년 동안 이들이 줄인 이산화탄소량은 약 1884t. 프로젝트 2년 차인 지난해에는 ‘북극곰 살리기 프로젝트’라는 이름을 붙여 회사 차원의 환경보호 캠페인이 됐다.
○ “습관의 변화가 널리 퍼졌으면”
탄소저감 운항이 쉬운 것만은 아니다. 바람, 기상 등 기후뿐 아니라 관제사의 협조도 필요하다. 서영주 기장(49)은 “가장 좋은 경제적 운항은 포물선을 그리며 나는 것이겠지만 직선 운항 구간이 있어야 승객들이 편안히 식사도 하고, 면세품도 구입할 수 있다. 또 연료효율에 최적화된 기류가 있는 고도에 진입하려면 관제사가 허용해 줘야 한다”며 “안전성, 정시성, 쾌적성을 모두 지키면서도 탄소저감 운항을 할 수 있도록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 프로젝트에 참여한 백 기장은 “20년 이상 굳어진 운항 습관을 바꾸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단순히 ‘환경을 보호하자’는 구호가 아닌 구체적인 데이터를 받으니 마음이 움직였다”며 “한 달에 기름 4000kg을 덜 쓴 데이터를 받아 보니 마음이 뿌듯했다”고 말했다.
그는 “조종 습관의 변화가 실생활도 바꿨다. 예전에는 마트 갈 때에도 자동차를 탔지만 이제는 반경 5km 거리 정도는 자전거를 탄다”며 웃었다. 황 기장은 “우리가 습관을 바꾸면 국가, 나아가 세계에 기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른 항공사, 또 관제사 등 항공 관계자들과도 탄소저감 운항법을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 기내 종이컵-냅킨도 친환경소재로… ‘그린 크루’ 캠페인 ▼
일회용 종이컵-플라스틱컵 안쓰게 임직원에 텀블러 선물해 사용 권고
“저도 ‘그린 크루’가 되고 싶습니다.”
최근 유하영 제주항공 운항본부 운항품질팀 운항품질심사관리담당은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유 담당은 제주항공 조종사들의 자발적인 탄소저감 캠페인인 ‘북극곰 살리기 프로젝트’를 지원하고 있다. 유 담당은 “특별히 ‘홍보활동’을 하지 않는 기간에도 연락처를 찾아 탄소저감 운항에 자원하고 싶다는 조종사분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2017년 기장들이 주축이 돼 만든 북극곰 살리기 프로젝트는 최근 전사적인 환경보호 캠페인으로 확대되고 있다. 탄소저감 운항 모임에 자원하는 조종사가 늘면서 다른 임직원들도 ‘그린 크루’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제주항공은 모든 임직원이 그린 크루가 될 수 있도록 올해 1월부터 북극곰 살리기 프로젝트 이름으로 다양한 환경보호 캠페인을 벌이기로 했다.
대표적인 활동은 일회용품 줄이기 운동이다. 제주항공은 올해 1월 종이컵과 냅킨 등 기내에서 사용하는 일회용품을 친환경 소재 제품으로 바꾸기로 했다. 제주항공이 지난해 기내에서 사용한 일회용 종이컵은 840만 개에 이른다. 제주항공은 이를 친환경 소재 종이컵으로 바꿨다. 표백하지 않은 천연 펄프를 사용하고, 종이컵 안쪽이 물에 젖지 않도록 하는 화학재료를 뺐다.
또 탑승객이 텀블러를 이용해 객실 내 에어카페 커피를 주문하면 1000원을 할인해 준다. 제주항공 사내 카페인 ‘모두락’에서도 차가운 음료 판매에 사용하던 플라스틱 사용을 중단했다. 2월에는 임직원들에게 텀블러를 선물해 일회용 종이컵이나 플라스틱 컵 사용을 자제하는 캠페인에 동참하도록 했다. 환경부에 따르면 일회용 종이컵 1개를 사용할 때마다 온실가스 약 6.9g이 발생한다. 종이컵을 덜 쓰는 것만으로도 이산화탄소 저감 운동에 동참하는 셈이다.
제주항공 관계자는 “작은 변화를 통해 임직원, 회사, 고객 모두가 환경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서비스를 개발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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