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뭇매를 맞은 일이 있었다. 나의 특정 발언이 좌중의 반발을 샀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소주는 좋은 술이 아니다.” 문제는 지인들의 정체가 20세 무렵부터 어울린 대학 친구들이었다는 것. 10여 년간 우리가 함께 마신 것은 8할이 소주였으니, 비난은 흡사 관직에 나아가더니 조강지처를 내팽개친 변절자를 꾸짖는 투였다. 특히 신입생 때 소주를 참 많이도 사줬던 선배가 열을 올렸다. “네가 뭔데 남이 맛있게 마시는 술을 나쁘게 말하냐?” 그러게. 나는 왜 단란한 술자리에서 논평의 언어를 쓰는가. 그리하여 술자리에서는 대충 논란을 무마하고, 뒤이었어야 할 이야기는 여기에 칼럼으로 옮긴다. 혹시 또 지면 너머 뭇 소주 애호가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겠으나, 모쪼록 끝 문단에 해당 발언에 대한 정정이 있다는 스포일러로 완독을 권한다.
우선 내가 소주를 꽤 좋아한다는 점을 짚어야겠다. 맛이나 향을 즐기는 건 아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사람은 술의 종류에 따라 상이한 감흥을 얻는다고 한다. 나는 맥주를 마실 때 기분 좋은 나른함을 얻고, 와인을 마실 때 고조되며, 소주 특유의 ‘이 테이블의 우리만 세상에서 사라진 듯한’ 취기를 좋아한다(아직 이렇듯 시적인 표현밖에 찾지 못한 점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길티플레저(죄의식을 동반하지만 했을 때 즐거운 일)’랄까. 요컨대 개인적 취향과 품질의 평가는 별개라는 뜻이다. 나는 둘을 구분해 객관화하는 습관이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뿐더러 좋아하는 대상에 한 발짝 가깝게 다가가도록 돕는다고 믿는다.
통상 소주를 저평가하는 가장 큰 근거는 제조법이다. 우리가 논한 소주는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초록 병 소주. 수입 타피오카나 고구마의 전분에서 얻은 에틸알코올에 물과 감미료를 섞어 만든다. 이런 희석주는 세계적으로 드문 축이며, 사실 우리가 전통주라고 일컫는 소주와도 하등 관계가 없다. ‘불사를 소(燒)’ 자가 내포하듯 소주는 본래 증류주니까. 희석식 소주가 시침 떼고 안방을 차지한 것은 1965년 양곡관리법이 시행되면서부터다. 안정적 식량 확보를 위해 곡식으로 술을 빚는 것이 금지되었고, 본연의 소주를 비롯해 일제강점기와 전쟁의 참화도 견뎌낸 전통주가 명맥을 잃은 것이다.
물론 역사가 짧거나 가격을 중심으로 개발됐다고 해서 무작정 낮잡을 수는 없다. 다른 가치를 추구했으며, 그 가치 안에서 성공한 제품인 것이다. 내가 소주를 폄훼한 맥락은 이랬다. 그날 술자리를 가진 곳은 전국의 지역 전통주를 취급하는 주점. 명인이 빚은 막걸리를 주문하려는데 누군가 이죽거린 것이다. “그 돈이면 소주가 7병인데.” 내가 문제 삼은 건 소주 자체라기보다 소주가 차지한 그런 위상이었다. 소주 외의 다른 술을 시키면 비아냥거리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소주는 어떻게 그런 ‘진정한 술’의 권위를 꿰찬 걸까? 소주를 싫어하는 이도 눈치상 억지로 마시게 하는 사회 분위기는 어디서 기인하며, 기껏 술의 한 종류를 평가 절하한 것이 왜 이리도 큰 반발을 부를까? 그러니 나는 이렇게 고쳐 말하면 좋을 것 같다. “그 속에 깃든 기이한 우월주의와 배타의 문화가 드러날 때 소주는 좋은 술이 아니다.” ‘저는 소주 마실게요’라고 말하고 잔을 하나만 가져다 홀로 따라 마실 때 소주는 오직 그때 소탈하고 호쾌한 술이다. 나도 요즘 그걸 연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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