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 미국 로스앤젤레스(LA)타임스는 한국 신생아의 1%인 5000명이 미국에서 태어나는 것으로 추산된다는 내용의 원정출산 실태를 보도했다. 이 기사에는 “한국에서 가장 불만스러운 것은 교육이고 병역 의무를 덜어주면 아이에게 큰 선물이 될 것”이라는 임신 8개월 김모 씨가 등장한다. 김 씨에 대한 묘사가 흥미롭다. ‘우아한 진주 장식 임신복을 입고 하이힐 샌들을 신고 BMW를 탄다’는 것. 2만 달러(당시 한화로는 약 2500만 원)나 드는 원정출산에 주로 부유한 사회지도층이 나서고 있음을 비꼰 것일 게다.
이듬해 경찰이 대대적인 수사에 나서 산모 50여 명이 참고인 조사를 받는 진풍경(구경거리가 될 만한 보기 드문 광경)이 벌어졌다. 2005년 원정출산이 명백하면 병역을 기피할 수 없도록 법이 강화되면서 원정출산 붐은 다소 시들해졌다.
그런데 임신부들이 다시 출산을 위해 살던 곳을 떠나는 ㉠‘신(新)원정출산’이 벌어지고 있다. 목적지는 외국이 아니라 대도시다. 지방에서 분만실을 갖춘 산부인과가 문을 닫으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지난해 특별시, 광역시를 제외한 시군구 신생아 18만5000명 중 1만9485명(10.5%)은 거주지 인근 특별시, 광역시의 병원에서 태어났다.
전국 226개 시군구 중 분만실이 없는 지역이 63곳에 이른다. 한 시간 내 분만실 이용이 어려운 분만 취약지도 33곳이다(2017년 12월 기준). 농산어촌뿐 아니라 경북 김천, 전남 나주같이 공공기관 이전으로 인구가 늘어난 혁신도시조차 출산 인프라가 붕괴하고 있다. 김천에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유일한 산부인과인 김천제일병원이 올해 안에 분만실을 폐쇄한다는 소식이다. 정부가 전국 분만 취약지 병·의원 15곳을 지원하고 있지만 산부인과 감소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산부인과가 분만을 기피하는 것은 출산이 고위험·고비용 의료행위여서다. 산부인과·마취과 의사와 간호사 등이 24시간 대기해야 하니 인건비가 많이 든다. 고령 임신부가 늘어나면서 고위험 분만이 늘었는데 응급 상황 시 이송 체계도 미흡하다.
과거에는 워낙 아이가 많이 태어나니 수지타산(수입과 지출을 바탕으로 이익이 되는지를 따져 헤아림)이 맞았지만 지금은 분만실을 닫는 편이 낫다. 출산장려금, 아동수당 뿌리면서 생색낼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 누구나 혜택을 보는 분만실부터 지원해야 한다. ‘아이를 낳으라’고 하기가 민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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