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유년의 기억은 대략 네다섯 살 때부터 시작합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억들마저도 발굴 현장의 깨진 유물 조각 같아서 퍼즐 맞추기를 해야 할 정도이지요. 당시 어머니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경상도 시골 학교 선생님이셨습니다. 당연히 신문도 배달되지 않아 직장 일로 멀리 계셨던 아버지가 우편으로 신문을 보내주셨고, 어머니는 읽은 후에 차곡차곡 한두 달 정도 모았다가 오일장이 서면 푸줏간 아저씨에게 갖다드렸지요. 당시에는 고기를 싸는 포장지로서 신문지가 유일하다시피 해서 쇠고기 반근과 돼지고기 반근 정도와 교환이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귀한 쇠고기를 얻게 된 날은 어머니께서 어린 형제들을 위해 꼭 빨간 쇠고깃국을 끓였습니다. 후에 저의 가족은 경기도로 이사를 했고, 친구 집으로 시험공부를 하려고 가면 분명 쇠고깃국이라며 차려 주셨는데 희멀건 국이 나와 고개를 갸웃하곤 했습니다. “이 국의 정체는 뭐지? 대체 무슨 맛으로 먹을까?” 하면서 말입니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가 경기도 출신 두 며느리를 보시고는 꼭 배워야 한다며 가르치신 요리가 두 가지 있습니다. 제사 때 올리는 탕국과 빨간 경상도식 쇠고깃국이 바로 그것입니다. 며느리들 역시 듣도 보도 못한 빨간색 쇠고깃국을 보고 의아해한 것은 마찬가지였겠지요. 왜 맑게 끓이지 않고 시골 장터국밥처럼 고춧가루를 넣을까 하면서 말입니다.
경상도와 경기도 간의 지역문화 충돌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어머니는 차후에라도 자식들을 위한 ‘내리사랑’ 음식을 며느리들에게 특별히 부탁한 것은 아닐까요? 물론 지금은 맑은 쇠고기뭇국이든 빨간 쇠고깃국이든 가릴 처지가 아닙니다만.
생전 아버지의 직장 동료분이 제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식당에 가면 국에 밥을 말아서 내오는 음식을 가능하면 배제하시고, ‘국 따로 밥 따로’ 메뉴를 고집하셨다고 합니다. 경상도 내륙의 고리타분한 관습에서 그러셨을 수도 있고, ‘따로국밥’의 추억 때문일 수도 있는데, 어쨌거나 대구를 중심으로 발달한 국밥 문화가 유전자처럼 각인된 결과이겠지요. 대구는 육개장의 본고장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따로국밥, 육개장 그리고 선지우거지해장국 등을 통칭해 대구탕(大邱湯)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각 음식의 연원이나 레시피는 분명 다릅니다.
예로부터 우시장이 형성된 곳이거나 교통의 요충지였으면 반드시 유명한 국밥집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지역마다 들어가는 부재료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시뻘건 국밥 한 그릇을 땀 뻘뻘 흘리며 뚝딱 해치우면 어느 누구나 세상 부러울 것이 없지요.
해마다 가정의 달, 5월이 되면 다 자란 자식들 생각보다는 돌아가신 어머님 생각에 빨간 쇠고깃국이 더욱 그리워집니다. 어렸을 적 부모님 가슴에 달아드렸던 카네이션도 빨간색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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