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층까지만 복원된 지금의 모습을 보고 ‘이게 정말 다 수리가 된 게 맞느냐’고 묻는 분들이 많아요. 그럴 때마다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복원 가능한 최대의 범위에서 ‘진정성’을 확보했다고 말이죠.”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10일 열린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 20년-문화재 수리의 현황과 과제’ 학술대회장에서 만난 김현용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43)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인생의 절반가량인 20년을 오롯이 익산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 복원에 매달린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대학교 4학년 때 아르바이트생으로 미륵사지와 인연을 맺은 후 2001년 미륵사지 석탑의 해체가 시작되자 건축조사보조원으로 일했고, 2007년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로 임용되면서 복원 과정을 총괄하는 책임자가 됐다.
미륵사지 석탑 복원의 국내 최고 전문가에게 이 같은 질문이 쏟아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지난달 30일 새로 준공된 미륵사지 석탑(서탑)은 9층으로 추정되는 완전한 모습이 아닌 한쪽이 붕괴된 모습을 그대로 놔둔 6층까지만 복원됐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이자 최대(最大) 석탑이면서 20년이라는 단일 문화재 역사상 가장 오랜 시간을 투입한 미륵사지 석탑은 왜 이런 모습으로 우리 앞에 다시 섰을까.
○ 달라진 문화재 복원, 동탑과 서탑의 비대칭
“성덕왕 18년(719년) 9월 미륵사에 진(震·벼락 또는 지진)이 있었다.”(삼국사기·三國史記)
“미륵사가 동방 석탑 중 최고라는 이름은 헛소리가 아니다. 100년 전에 벼락이 떨어져 그 절반이 허물어졌다.”(와유록·臥遊錄·1756년)
각종 기록처럼 미륵사지 석탑은 백제 무왕 때인 639년 지어진 후 1300여 년의 세월을 견디면서 제 모습을 상당 부분 잃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모습은 1910년 12월 일본인 조사단이 촬영한 사진이다. 당시에도 이미 동탑은 자취를 잃었고, 서탑은 6층까지만 남은 채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한 모습이었다.
일제는 1915년 콘크리트 185t을 투입해 붕괴된 석탑의 벽면을 응급 보수했다. 하지만 8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콘크리트로 뒤엉킨 석탑은 흉물이 돼버렸다. 결국 1999년 문화재위원회는 전격적으로 석탑의 해체 후 보수정비를 결정했다.
문제는 석탑의 원형을 어떻게 설정할지였다. 창건 당시 미륵사지 석탑의 모습을 알려주는 문헌이나 그림 등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계 일부에서는 1993년 복원된 미륵사지 동탑처럼 9층으로 쌓아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그러나 동탑은 20세기 한국 문화재 복원 역사상 최악의 사례로 꼽힐 만큼 실패작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동탑의 원형을 추정할 기록이 없으니 서탑의 형상을 본떠 만들었고, 기계로 석재를 가공해 문화재가 주는 특유의 색감도 살리질 못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버리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결국 2011년 문화재청은 국제학술대회와 문화재위원회 심의 등을 거쳐 ‘익산 미륵사지 보수정비 기본원칙’을 세운다. 총 4가지로 △추론에 의한 복원을 지양하고, 남아있던 6층까지만 보수해 진정성을 확보한다 △원형을 보존하기 위해 훼손된 부재(部材·탑의 재료)는 과학적 방법으로 보강해 최대한 재사용한다 △전통기법만으로 원형 유지가 어려운 경우에는 최소한으로 현대적 기술을 적용한다 △조사, 연구, 시공 등 모든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미륵사지 석탑은 다소 불완전해 보이는 6층의 형태로 돌아왔다. 김 학예연구사는 “30년 가까운 시차를 두고, 나란히 서 있는 미륵사지 서탑과 동탑의 비대칭적인 모습은 한국 문화재 수리 역사와 가치관의 변화를 설명하는 가장 극명한 사례”라며 “미륵사지 석탑 복원은 추론이 시작되는 지점에서 멈춰야 한다는 문화재 보존의 보편적 이념을 충실히 구현했다”고 말했다.
○ 원형을 둘러싼 감사원과 문화재청의 시각차
하지만 준공을 앞두고 새로운 논란이 불거졌다. 올해 3월 감사원이 “미륵사지 석탑의 재료와 공법이 원형과 다르게 복원됐다”는 감사 발표를 한 것. 감사원의 지적 사항은 크게 2가지다. 돌 사이의 틈을 메우는 충전재로 성능이 우수한 실리카퓸 배합제를 사용한다는 계획에서 충분한 검토 없이 황토 배합제로 바꾸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 석탑 내부의 중심 기둥인 적심(積心)을 모두 새로운 석재로 쌓겠다는 계획과 달리 1, 2층에만 이를 적용하고 3층 이상에서는 옛 부재를 활용해 안정성과 일관성을 잃었다고 발표했다.
김 학예연구사는 “충전재로 사용하려 했던 실리카퓸의 색깔이 시멘트와 매우 유사해 과거 흉물로 느끼게 한 것과 비슷한 모습이 나올 것으로 우려됐다”며 “천연 재료인 황토 배합제를 사용해도 충분히 안정성에 문제가 없다는 실험 결과를 확보했고, 2016년부터 진행한 모니터링에서도 안전하다는 평가 결과가 나왔다”고 말했다. 적심에 옛 부재를 활용한 점 역시 하중이 가장 몰리는 1, 2층에는 내구성이 강한 새로운 돌을 사용한 후 3층 이상부터는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기존 석재를 최대한 보강해 사용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미륵사지 석탑은 옛 부재 재사용률을 81%까지 끌어올렸다. 불가피하게 새로운 돌을 쓸 때에도 옛 부재와 성분이 가장 유사한 전북 익산의 화강암인 황등석을 사용했다. 석탑 전체로 봤을 때 옛 부재와 새 부재의 비율은 각각 65%와 35%다.
문화재계에서는 감사원의 감사 발표가 문화재 복원을 가로막는 형식 우선, 행정편의주의의 대표적인 예라고 지적한다. 이왕기 이코모스(ICOMOS·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한국위원회 위원장은 “애초 계획보다도 옛 부재를 더 많이 사용하고, 전통 재료를 구현하려 한 노력을 두고 계획서와 다르니 원형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라며 “문화재 가치와 중요성은 무시한 채 단순히 건물을 고치고 짓는 것처럼 일괄적인 표준시방서와 셈법을 강요해서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 무조건적인 원형 집착에서 벗어날 때
문화재 복원은 무조건 옛것을 좇을 수도, 그렇다고 현재의 기술만을 반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일정 부분의 원칙은 있다. 바로 사회적 합의다.
대표적으로 경복궁을 보자. 1990년대부터 본격적인 경복궁 복원 계획이 발표되면서 원형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란이 불거졌다.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창건한 경복궁이 원형이라는 주장과 1865년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중건된 경복궁이 기준이 돼야 한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다. 결국 문화재청은 19세기의 경복궁을 원형으로 택했다. 태조 때의 경복궁은 건물 높이가 낮아 현실적으로 기준으로 삼기에 어려웠고, 고종 때의 건축 기록이 더 풍부했기 때문이다.
전봉희 한국건축역사학회장(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은 “문화재 중에서도 특히 건축문화재는 원형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게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며 “문화재 복원 역시 하나의 역사적 결과물이기 때문에 정답을 좇기보단 당대 사회가 도출할 수 있는 최대 범위에서 합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달 15일 화재로 지붕과 첨탑이 무너져 내린 노트르담 대성당의 복원에서 현대적 건축양식을 도입하는 데 반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이후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 방식으로 지붕 전체를 스테인드글라스로 덮거나 탄소섬유 재질로 불꽃을 형상화하는 등 창의적인 설계안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 지어진 12세기가 원형인지 첨탑이 세워진 18세기가 기준인지로 다투는 모습은 오히려 찾기 어렵다. 이른바 문화 선진국으로 불리는 프랑스의 현 모습이다.
수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에게는 지금도 보수정비를 기다리는 문화재가 가득하다. 이들 역시 원형을 찾기 위한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 다만 이제는 한 가지 단서를 더 붙여도 되지 않을까. 2019년 우리의 모습을 얼마나 반영할 수 있는지 말이다. 원형에 대한 애착도 좋지만 문화재 복원을 바라보는 자신감 있는 시선이 이제는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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