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전문직 이모 씨는 지난달 예금과 국내 주식 8000만 원어치를 팔아 달러 정기예금에 3만 달러를 넣었다. 이어 미국 주식과 국채에 3만 달러를 투자하고 남은 1만 달러는 현찰로 받아 개인 금고에 보관했다. 이 씨는 “지금 한국에 투자하면 손실을 볼 가능성이 커 가급적 해외에 투자하는 게 맞다고 본다”고 말했다.
최근 금융시장의 안전자산 선호 현상은 경제 부진과 시장 불안에 지친 투자자들의 불가피한 선택으로 풀이된다. 부동산 시장 침체와 강화된 대출 규제 등으로 마땅히 투자처를 찾지 못한 시중 자금이 일단 수익률은 낮더라도 안전하게 파킹(주차하듯 박아 넣는다는 의미)할 수 있는 투자 피난처로 옮겨 간다는 해석도 나온다.
○ 수요 폭증에 금괴 부족
대표적 안전 자산인 금은 수요가 크게 늘면서 공급에 차질을 빚고 있다. 20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은행은 금괴 제조사가 물량을 맞추지 못해 13일부터 10g짜리와 100g짜리 금괴 판매를 일시 중단한 상태다. 우리은행도 이달 들어 10g짜리 금괴가 매진돼 급하게 물량 확보에 나서기도 했다.
최근 약 300만 원을 들여 10g짜리 금괴 6개를 구입한 주부 이모 씨(48)는 “리디노미네이션(화폐 단위 조정) 이슈도 있다 보니 소액이라도 실물을 사는 게 낫다고 봤다”고 말했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50만 원 안팎인 10g짜리가 다 팔렸다는 건 고액 자산가뿐 아니라 중산층 수요도 많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김수호 한국금거래소 매니저는 “금값 상승보다는 경기 침체를 걱정하며 구입한 경우가 다수”라고 입을 모았다.
미국 달러를 찾는 수요도 크게 늘고 있다. 연초 1120원 선에 머물던 원-달러 환율은 1190원대까지 치솟았다. 최정욱 미래에셋대우 울산WM2영업본부 프라이빗뱅커(PB)는 “투자자들은 원화 가치가 더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미국 달러화를 사들이고 있다”며 “원화로 살 수 있는 국내 기업 주식은 지금 수익률이 부진한 편이지만 미국 달러화를 보유하고 있으면 세계 어디든 투자할 수 있고 환차익도 노릴 수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펀드 시장에서도 상대적으로 원금 손실 가능성이 낮은 채권형 펀드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올 들어 17일까지 국내 채권형 펀드에 6조 원 가까운 돈이 몰렸고 해외 채권형 펀드에도 1조 원의 뭉칫돈이 유입됐다. 반면 위험 자산으로 분류되는 국내 주식형 펀드에서는 같은 기간 1조5000억 원이 빠졌다.
일부 투자자들은 가상통화로 눈을 돌리고 있다. 가상통화는 비록 안전 자산은 아니지만 부동산 증시 등 기존 투자처의 대안이나 포트폴리오의 분산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 20일 오후 7시 현재 비트코인 시세(업비트 기준)는 952만 원으로 연초 300만 원대에 머물렀던 것에 비해 세 배가량으로 치솟았다.
○ 미국 달러, 채권형 펀드 인기… 한국 경제 못 믿어
이 같은 투자 패턴 변화의 배경에는 한국 경제의 미래와 정부 정책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성장률이 1분기 마이너스를 나타내고 수출 등 거시지표가 바닥을 기면서 원화 가치는 다른 신흥국 통화에 비해 훨씬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현 정부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을 지낸 김광두 서강대 석좌교수도 페이스북에 “경기 침체가 시작돼 가파른 속도로 심화되고 있다”며 경제위기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는 1997년 외환위기 직전을 언급하면서 “그때 경제부총리가 펀더멘털이 튼튼하다고 했는데 요즘 최고위 당국자들이 쓰는 용어를 들으면서 그때의 악몽이 떠오른다”고 경고했다.
리디노미네이션 얘기가 나오면서 최근 금값이 오르는 것도 그런 현상이다. 정부와 한국은행이 연일 부인하고 있지만 시장이 이를 믿지 않고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이날 “리디노미네이션 검토도, 추진할 계획도 없다”며 재차 진화에 나서기도 했다.
박태근 삼성증권 글로벌채권팀장은 “한미 간 기준금리 역전 현상, 낮은 잠재성장률 등 그동안 가려져 있던 한국 경제의 문제점이 한꺼번에 부각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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