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오랜만에 남측 인사들의 평양 방문이 잦았던 지난해 하반기 평양. 북한 당국자가 “남북관계 진전은 남측 하기에 달렸다”는 당의 지시문을 암송하듯 말하자 남쪽 방문자가 “북측도 약속을 지켜야 한다. 김정은 위원장이 서울 답방을 하면 분위기가 확 달라지지 않겠느냐”고 받아쳤다고 한다. 북쪽 당국자는 주변에서 감시하는 보위부(우리의 국가정보원) 요원들을 의식한 듯 정색하며 “어떻게 그런 무엄한 말을 할 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쪽 방문자들이 김 위원장 그림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으려 할 때마다 안내원들은 “김 위원장이 근사하게 찍히지 않은 사진이 남측 SNS에 잘못 퍼지면 내가 곤란해진다”며 읍소를 했다.
김 위원장이 지난해 4월 27일 판문점 도보다리 위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평양냉면을 공수해 와 “멀다고 말하면 안 되갔구나…”라고 인간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것을 보면서 ‘그는 할아버지, 아버지와 조금 다른 독재자인가’라는 순진한 질문을 갖게 됐다.
이후 북한을 방문하거나 제3국에서 북측 인사와 접촉한 취재원들에게 물어물어 모은 증거를 종합하면? 그 역시 선대처럼 신격화된 독재자에 불과했다.
독재도 독재 나름이다. 정치학자 스테펀 해거드와 로버트 코프먼은 공저 ‘민주화의 정치경제’(1995년)에서 ‘목적’을 기준으로 좋은 독재와 나쁜 독재를 구분했다. 집중된 권력을 공익을 위해 쓰면 전자, 일부 지지층의 사익을 위해 쓰면 후자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과 한 줌의 추종자들이 2, 3, 4대를 이어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나쁜 독재다. 나쁜 독재는 관료적 경화(ossification)와 약탈(predation)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엘리트들이 독재자의 변덕스러운 의중을 읽느라 복지부동하고, 독재자는 엘리트와 대중의 가치를 마음대로 유린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이후 김 위원장이 동분서주하며 대외 평화공세를 폈지만 단골 등장인물은 그를 포함해 10여 명에 불과하다. 그 판에 끼지 못한 엘리트들은 “정말 비핵화를 하겠다는 것인지, 그냥 하는 말인지 알 수가 없다”며 외려 남측 인사들에게 물어볼 정도였다고 한다. 올해 2월 하노이 회담에서야 김 위원장의 내심이 드러났고, 말로만 비핵화와 남북 교류 놀음에 부화뇌동한 대미 대남 일꾼들은 지금 조직지도부의 검열을 받고 있다는 소식이다.
경제 분야도 마찬가지다. 조선중앙TV는 김정은이 ‘인민경제 제일주의’를 외치며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내보내지만 경제 관료들은 ‘경제 제재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손놓고 있다고 한다. 2011년 집권 이후 김정은의 한마디에 고모부 장성택과 이복형 김정남, 수많은 당정군 관료들이 생명을 잃고 전 재산을 털리는 것을 목격한 이들은 그저 복지부동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국내외에서는 ‘협상의 달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사기’라는 등 음모론이 아직도 나오고 있지만 핵심 원인은 북한 체제 내부에 있다. 독재자가 “우리가 영변 내놓으면 미국이 당연히 제재 풀어야지?”라고 내심을 밝힌 이상 그 어느 누가 “트럼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김정은이 말로는 “경제 재건 우선”을 외치지만 속으로는 정권 유지를 위해 엘리트와 인민들이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급급해 딴생각을 못 하게 하는 게 더 낫다고 여기지 않을까.
북한이 국제사회가 원하는 완전한 비핵화와 개혁개방의 길로 가기 힘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시대착오적인 김씨 3대 세습 독재정치다. 독재자의 측근들도 공공연하게 말한다는 명백한 진실을 우리가 굳이 외면하고 미화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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