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외교관 K 씨가 자유한국당 강효상 의원에게 한미 정상 간 통화 내용을 유출한 사건을 두고 청와대는 분노와 충격, 우려가 공존하는 분위기다. 외교부에 대한 불만과 별개로 청와대는 이 문제의 확전을 자제하며 파장 최소화에 나서고 있다. 통화 내용 유출이 국내 정치는 물론이고 한미 관계 등에 미칠 파장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 다음 달 한미 정상회담 앞두고 초대형 악재
청와대는 23일 이번 사건에 대해 “한미 간 신뢰를 깨는 문제가 될 수도 있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우리 정부의 내부 단속 실패로 한미 정상의 대화가 외부로 흘러나갔다는 사실은 양국의 외교적 신뢰와 정보 공유 문제로 번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 비핵화 협상 과정에서 “미국 정부가 한국을 100% 신뢰하지는 않는 것 아니냐” “한미 간 정보 공유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던 상황에서 이번 유출 건까지 터지면서 다음 달 한미 정상회담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많다. 한 외교 소식통은 “한미 공동 대응을 위해 미국 측은 자체 정보를 우리에게 전달했는데, 이 정보 중 일부가 북한으로 전달됐다는 의심이 백악관 인사들 사이에서 있었다”며 “이번 건까지 더해져 만약 백악관이 청와대를 향해 ‘보안에 자신 있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게 됐다”고 말했다. 외교부 내에서도 “대이란 석유제재 면제, 남북 협력사업 추진 등 현안을 위한 한미 소통에도 지장이 빚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여기에 참모 간 대화가 아닌 양국 대통령의 통화가 유출됐다는 점에서 상황은 더 심각하다. 정부 관계자는 “그간 신뢰와 친분을 쌓은 두 정상이 통화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며 “백악관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공식 반응은 자제하면서도 속으로는 유출 사실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할 것 같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 “일부 외교관들이 정권 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며 격양된 靑
청와대가 우려 섞인 시선으로 백악관을 주시하는 것과 달리 외교부를 바라보는 시선은 분노 그 자체다. “외교부가 결국 대형 사고를 쳤다”는 것이다.
그간 청와대 안에서는 외교부가 문재인 대통령의 뜻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이 가득했다. 한 관계자는 “일부 외교관들은 아직도 정권 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굴고 있다”고 성토했다.
이번 사건이 강경화 외교부 장관의 책임론까지 번질 가능성도 있다. 여권 관계자는 “재외공관 가운데 핵심 중의 핵심인 주미대사관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건 조직 관리가 전혀 되고 있지 않다는 증거”라며 “강경화 비토론이 다시 고개를 들 수 있다”고 말했다.
○ 통화 ‘진실 공방’ 피하려는 靑
청와대가 이 문제의 확산을 자제하는 것은 강 의원의 9일 기자회견 내용을 둘러싼 ‘진실공방’으로 번지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도 있다. 고교 후배인 K 씨로부터 통화 내용을 전달받은 강 의원은 기자회견을 통해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잠깐이라도 한국을 방문해 달라’고 설득했다”고 주장했다. 또 “일정이 바빠 문 대통령을 만난 후 즉시 떠나야 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도 소개했다. 기자회견 직후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강 의원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K 씨가 통화 내용을 알려줬다는 것이 드러난 이상 강 의원의 주장이 사실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게 됐다.
결국 다음 달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을 두고 ‘저자세 외교’ 논란은 물론이고 25일 시작되는 트럼프 대통령의 방일 일정과 비교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청와대는 정면 대응을 자제하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날 강 의원의 어떤 주장이 허위인지를 묻는 질문에 “어떤 내용이 맞다, 틀리다 말하는 것이 기밀 누설이라서 일일이 다 확인 드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이번 사건이 누구의 유불리를 떠나 한국 정부에 대한 국제사회의 총체적 신뢰 저하를 가져올 수 있는 만큼 ‘외교적 자해 행위’를 자제해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한국당 소속인 윤상현 국회 외교통일위원장은 이날 입장문을 내고 “정부 외교관 정치 모두 책임 있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 한미 관계를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민감한 시기에 국익을 해치는 무책임한 행동을 했다”며 “이슈가 더 이상 확산되지 않도록 청와대를 비롯한 당사자 모두 책임을 다해 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