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가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규정한 것은 술이나 도박처럼 게임도 과도하게 몰입할 때 나타나는 폐해를 미리 예방하고 조기에 치료해야 한다는 국제적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게임중독에 질병코드를 부여하면 국가 간 비교 가능한 통계를 얻을 수 있다. 이런 구체적 실태 파악은 치료 연구를 위해 꼭 필요하다. 또 각국 정부는 게임중독 예방과 치료에 필요한 예산을 마련하면서 WHO의 결정을 근거로 삼을 수 있다.
게임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자녀를 둔 학부모나 정신건강학회는 이번 결정을 크게 반기는 분위기다. 게임 자체를 ‘악’으로 매도해선 안 되지만 게임 과몰입 증세가 뚜렷한 개인을 상대로 선제적 진단과 처방을 통해 게임 통제력을 회복시킬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임상 데이터가 쌓이면 청소년 중독 예방 효과가 더 커질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 게임중독 시 도박중독과 뇌 반응 유사
게임중독 논란은 1981년 영국에서 처음 제기됐다. 1978년 등장한 아케이드게임인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중독을 일으켜 일탈을 초래한다며 이를 금지하는 법안이 상정됐다. 당시 법안은 부결됐지만 게임중독을 규제해야 한다는 첫 목소리였다. 한국에서도 1990년대 후반 인터넷 게임이 활성화되면서 청소년 게임중독이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WHO는 2014년부터 게임중독을 중요한 공중보건학적 문제로 보고 대응에 나섰다. 그해 게임중독을 ‘게임 이용장애(Gaming Disorder)’로 규정하고, 구체적인 진단 기준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발표한 게임중독 진단 기준은 지속성과 빈도, 통제 가능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게임 시간과 빈도, 종료 등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일상의 다른 관심사보다 게임을 우선시하며 △게임 몰입으로 부정적 결과가 발생해도 게임을 중단하지 못하는 상태가 12개월 이상 지속되는 경우를 게임중독으로 규정했다.
우리나라에선 올 1월 20대 남성이 생후 두 달 된 아들의 울음소리가 게임에 방해가 된다며 아이를 때리고 방치해 숨지게 한 사건도 있었다. 보건복지부와 삼성서울병원이 2016년 만 18세 이상 50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성인 100명 중 1명꼴로 게임중독 증세가 나타났다. 특히 18∼29세 남성의 게임중독(스마트폰 중독 포함) 유병률은 5%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 중 하나는 도박중독과 비슷한 뇌 반응이 나타난다는 연구들이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 권준수 이사장은 “게임중독에 쉽게 빠지는 사람은 도파민 분비가 많아 같은 자극에도 쾌감을 더 잘 느낀다”며 “그 행위를 중단했을 때 금단 증상이 나타난다면 ‘중독’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말했다.
○ 다음 달 게임중독 민관협의체 발족
전문가들은 게임중독의 질병코드 등재로 기존의 상담 및 치료 시스템이 크게 개선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의정부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이해국 교수는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규정한 핵심 이유는 청소년의 게임 과몰입 폐해를 막자는 것”이라며 “성인이 돼서도 즉각적인 만족만 추구하는 충동적 성향이 나타나지 않게 하려면 청소년기 조기 진단과 예방에 정부와 의료계가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의료계 내에서도 게임중독의 원인이 게임 자체인지, 아니면 스트레스 등 외부 환경 때문인지 명확하지 않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와 미국 존스홉킨스대, 호주 시드니대 등 교수 26명은 2017년 WHO에 서한을 보내 ‘게임중독이 질병이라는 결론을 내린 연구의 질이 낮아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냈다.
복지부는 게임중독의 질병 등재에 따른 향후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게임업계와 보건의료 전문가, 법조계 인사 등으로 구성한 민관협의체를 다음 달 발족할 계획이다. 게임중독을 질병으로 관리하는 만큼 게임 광고를 일정 부분 규제하는 내용 등이 담길지 주목된다. 일각에선 담배에 국민건강증진부담금을 부과하는 것처럼 게임중독 예방 및 치료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게임중독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복지부는 “현재까지 게임중독세를 추진하거나 논의한 바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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