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훈 국가정보원장이 지난주 양정철 더불어민주당 민주연구원장과 4시간가량 만찬을 겸한 회동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지인들과의 모임에 함께 참석했을 뿐이라지만, 국가정보기관 수장이 내년 총선 전략을 짜는 여당 실세와 사적으로 만났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부적절한 처신이 아닐 수 없다. 야당은 즉각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을 어긴 것”이라고 비판했다.
서 국정원장이 비공개로 만난 양 연구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복심’으로 통하는 최측근 친문(親文) 인사다. 그런 대통령과의 지근거리 때문에 지난 2년간 해외에서 사실상 유랑생활도 했다. 이제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여당에 들어가 ‘총선 승리를 위한 병참기지’ 역할을 하겠다며 전략 수립과 인재 영입에 의욕을 내비친 인물이다. 얼마 전엔 문희상 국회의장이 양 원장을 단독으로 만나 대화를 나눈 것을 두고 ‘정권 실세’ 논란을 낳기도 했다.
그런 정치적 인사와 만나는 것은 서 원장으로선 극도로 경계했어야 할 일이다. 두 사람은 문 대통령의 대선후보 시절부터 이어진 친분이라지만 그럴수록 더욱 회피했어야 한다. 그런데도 양 원장에 따르면 서 원장이 먼저 두 사람을 다 아는 지인과의 모임에 합류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그날 만찬에 누가 참석했는지,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밝혀야 한다. 서 원장은 아예 말이 없다. 국회 정보위원회를 통해서라도 반드시 규명해야 한다.
서 원장의 분별없는 처신은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과 탈(脫)정치화 의지를 의심받을 빌미를 스스로 제공한 것이다. 과제로 남아 있는 정보기관 제도 개혁도 그 동력을 잃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더욱이 서 원장은 정보기관 수장으로서 간과하기 어려운 실책도 범했다. 공개 일정을 제외하곤 드러나지 않게 움직여야 할 정보 수장의 행적이 드러났고 인터넷 매체에 사진까지 찍혔다. 은밀성과 보안성이 생명인 정보 수장의 동선 노출에 직원들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전임 정부의 국정원장들이 줄줄이 특별활동비 상납과 정치 개입 혐의로 쇠고랑을 차는 모습을 지켜본 게 불과 얼마 전이다. 음지에서 일하는 정보기관은 태생적으로 비밀과 의심 속에서 살아야 하는 만큼 사소한 오해의 빌미도 줘선 안 된다. 그런 기본조차 제대로 못 지키는 정보 수장이라니 참으로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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