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때 당당… 당시 러 신문기사 24건 공개
安의사 “이토 사살, 마지막 아니다”… “기독교 묘지 매장” 유해 찾을 단서도
“죽음은 두렵지 않다. 당신들의 고문도 두렵지 않다. 죽으면서도 나는 기쁘다. 나는 조국 해방을 위한 첫 번째 선구자가 될 것이다.”(‘프리 아무리예’ 1909년 10월 20일자)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哈爾濱)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1879∼1910)의 의거부터 신문, 순국까지를 자세히 다루며 안 의사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러시아 지역신문 기사들이 공개됐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28일 설립 50주년을 맞아 처음으로 공개한 기사 24건은 하얼빈 거사부터 이듬해 순국 직후인 4월까지 러시아 극동지역 신문들에 실린 것들이다.
거사 첫 보도는 ‘달니 보스토크’의 1909년 10월 28일자 기사로 보인다. 이 기사는 ‘이토 공작이 세 발의 총상을 입어 사망했고 조선인으로 밝혀진 범인이 체포됐다’고 전했다. 같은 해 11월 2일 ‘프리 아무리예’는 거사를 위해 하얼빈으로 떠나는 안 의사를 르포르타주 형식으로 묘사했다. 당시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의 신문에 당당하게 임한 안 의사의 진술도 담았다. ‘보스토치나야 자랴’ 기사에서 안 의사는 “이토 사살은 우리 조국 역사의 마지막 장이 아니다. 아직 살아 있는 것이 기쁘며 내 유골에 자유가 비출 것”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프리 아무리예는 1910년 2월 27일자에서 사형이 선고된 재판을 다루면서 안 의사가 “모든 조선 사람들이 이토를 혐오하고 조선 민족의 원수인 그를 나쁜 짓을 하는 무대에서 하루빨리 몰아내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한 최후 진술을 소개했다. 안 의사의 시신 매장지에 대한 단서를 담은 기사도 눈길을 끈다. 일간지 ‘우수리스카야 아크라이나’의 1910년 4월 21일자 기사에 따르면 안 의사의 시신은 그해 3월 26일 사형이 집행된 직후 관에 넣어져 중국 뤼순(旅順) 감옥 내 작은 예배당으로 옮겨졌다가 그 지역 기독교 묘지에 매장됐다. 안 의사 시신은 뤼순 감옥의 공동묘지에 묻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다만 뤼순 감옥 근처에 기독교 묘지가 있었는지, 또 이 기사가 얼마나 믿을 만한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안 의사는 ‘하얼빈공원 옆에 묻어두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국으로 옮겨 달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시신을 찾지 못해 지켜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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