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성북구의 한 원룸에 혼자 거주하는 20대 여성 권모 씨는 며칠 전 자신의 휴대전화로 아버지 목소리를 녹음했다. 이 녹음 파일을 재생하면 “누구세요?” “왜 그러세요?”라고 묻는 아버지 목소리가 나온다. 권 씨가 아버지 목소리를 녹음해 둬야겠다고 생각한 건 지난달 28일 인터넷에 유포된 이른바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 동영상을 보고난 뒤다. 문 밖에서 낯선 사람이 노크를 하면 녹음해 둔 아버지 음성을 틀어 집 안에 남자가 있는 것처럼 하기 위해서다. 권 씨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며 “아무리 대비를 해도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절망스럽기도 하다”고 말했다.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 당시 상황을 담은 폐쇄회로(CC)TV 영상이 인터넷을 통해 유포된 뒤로 권 씨처럼 혼자 사는 여성들이 각자 나름의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다. 직장인 이하나 씨(26·여)는 사건 동영상을 접한 뒤로 매일 밤 잠들기 전 빨래 건조대를 출입문 쪽으로 바짝 붙여 놓는다. 자고 있는 동안 누군가가 문을 따고 침입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다.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이 발생한 곳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살고 있는 이 씨는 빨래 건조대가 넘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경찰에 신고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 수 있을 것 같아 이런 자구책을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이 씨는 또 자신이 거주하는 원룸의 도어록 번호키 비밀번호를 누른 뒤에는 반드시 소매로 번호키 위를 문질러 닦는다. 누군가가 번호키에 남은 지문을 보고 비밀번호를 알아낼까 봐 두려워서다.
집 안에 다른 사람이 같이 있는 것처럼 연기를 하는 여성도 있다. 직장인 박모 씨(28·여)는 배달음식을 주문한 뒤 배달원이 벨을 누르면 집 안에서 “야! (배달) 왔다!” 하고 누군가에게 알리듯이 큰 소리로 말한다. 박 씨는 한 남성 배달원이 배달을 왔다가 자신의 집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내부를 훑어보는 일이 있은 뒤로 이런 연기를 하게 됐다고 한다. 한 유튜버는 박 씨처럼 불안해하는 여성들을 위해 “자기가 좀 받아줘” “그냥 가세요”라고 말하는 등 남자 목소리가 담긴 9개의 파일을 제작해 무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열쇠 수리공들조차 쉽게 열지 못하는 특수 보조키와 소형 CCTV 등을 설치하는 여성도 많다. 보안업체 ADT캡스에 따르면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 동영상이 유포된 지난달 28일 이후 소형 CCTV 관련 문의가 평소보다 30% 이상 많아졌다. 열쇠 수리업자 금모 씨(31)는 “특수 보조키 설치에 대해 물어보는 손님의 80%는 혼자 사는 여성들”이라고 했다. 강지현 울산대 경찰학과 교수가 2017년 발표한 ‘1인 가구의 범죄 피해에 관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33세 이하 1인 가구 중 여성이 주거침입 피해를 입을 확률은 남성보다 약 11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신림동 강간미수 사건’ 당시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관들의 대응이 미흡했다는 논란이 일면서 여성들 사이에서는 경찰에 대한 불신도 커지고 있다. 취업 준비생 고모 씨(26·여)는 “선배들이 무슨 일이 생기면 112에 신고하지 말고 119에 신고하라는 ‘팁’을 줄 정도”라고 말했다. 서울 관악경찰서는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관들이 당시 범행 발생 장소인 원룸 건물 6층을 확인하지 않고 철수했다는 지적이 나오자 초동조치에 문제가 없었는지를 조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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