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저리그(MLB)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평균 시속 150km를 오가는 ‘파이어볼(강속구)’이 대세로 자리 잡는 가운데 강속구보다 평균 시속 10km 이상을 ‘하회’하는 느린 공으로 타자들을 얼어붙게 만드는 ‘아이스 볼’로 선전하는 선수들도 화제를 모으고 있다. 구속을 낮춘 일부 선수들은 그 대신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을 공략하는 칼날 제구를 바탕으로 ‘커리어 하이’에 도전하고 있다.
2010년 데뷔 후 10시즌 동안 선발과 구원을 수시로 오가며 마운드의 빈 곳을 메워 온 ‘마당쇠’ 장민재(29)는 올해 한화 토종 선발진의 히트상품으로 자리매김했다. 붕괴된 선발 마운드를 메우려 4월부터 선발로 전업한 뒤 선발로 6승(리그 4위)을 거두며 2016, 2018시즌 자신의 한 시즌 최다 승수(6승)를 이미 달성했다. 올 시즌을 앞두고 패스트볼 평균 구속을 약 2km 낮추고 제구에 집중했는데, 평균 136.1km의 ‘느린 패스트볼’과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스플리터, 슬라이더에 타자들은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상대를 압도할 만한 공은 아니지만 리그 탈삼진도 어느덧 7위(63개)에 올라 있을 정도. 지난달 28일 경기에서는 데뷔 후 최다인 8이닝(무실점)을 소화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원조 아이스 볼러’라고 할 수 있는 두산 유희관(33)도 지난해 부진을 털고 올해 완벽하게 살아났다. 비시즌 동안 7kg을 감량한 모습으로 새 시즌을 맞은 유희관은 평균자책점 2.91(리그 8위)로 과거의 유희관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건 평균자책점뿐만이 아니다. 패스트볼 평균 구속을 지난해 129.6km에서 전성기 시절인 128km대로 낮추며 타자들의 타이밍을 뺏고 있다. 승운이 따르지 않는 게 다소 아쉽지만 자신감을 완벽히 회복하며 최근 22와 3분의 2이닝 연속 무실점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불혹을 바라보는 삼성 윤성환(38)도 느린 공으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과거 135km대의 패스트볼을 던지면서도 볼 끝이 좋아 파워 피처 못지않은 위압감을 줬던 윤성환은 올해 패스트볼 평균구속을 4km나 낮춰 평균 시속 131.3km를 기록 중이다. 지난달 8일에는 공 99개로 완봉승을 거뒀는데, 한껏 느려진 공에 상대 타자들은 방망이를 수시로 헛돌리며 윤성환의 ‘효율 투구’를 도왔다.
2015년 1군 무대 데뷔 후 올 시즌 처음 붙박이 선발로 나선 NC 박진우(29)도 평균 시속 134.7km의 느린 패스트볼을 앞세워 타자들을 애먹이고 있다. 올 시즌 전까지 ‘통산 2승’에 불과했던 그는 올 시즌 4승 5패 평균자책점 3.50으로 NC 선발진의 한 축을 든든히 지키고 있다.
프로 출신의 한 야구인은 “첨단장비로 구속 등을 정밀하게 측정하며 구속, 회전수 최고 수치에만 관심이 쏠려 있다. 이들의 ‘역주행’ 행보는 야구에 다양한 색깔을 입혀준다는 점에서 오히려 고무적”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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