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가 살던 개천’이란 아름다운 뜻의 녹천(鹿川)은 사실 죽은 물이다. 천 옆에는 인간의 배설물이 질펀하게 깔려 있고 공장 폐수가 흐른다. 주인공이 그토록 원했던 23평(약 76m²)짜리 아파트는 아이러니하게도 녹천 바로 옆에 있다. 무대 위에서 아파트와 녹천의 똥밭이 중첩되는 순간, 관객은 ‘어떻게 사는 게 맞느냐’고 자문한다.
연극 ‘녹천에는 똥이 많다’는 이창동 영화감독의 1992년 단편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1980년대 안락하게 살고 싶다는 일념으로 아파트 한 채만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홍준식의 이야기다. 그토록 원하던 아파트에 입주한 그는 거실에 소박하게 수족관을 하나 들여놓고 싶다는 소원을 안고 산다.
그런 그의 아파트에 꿈과 이상, 순수함을 상징하는 이복동생 ‘강민우’가 찾아들며 그의 가정과 신념이 흔들린다. 시궁창 같은 녹천에 살면서도 ‘아파트’에 만족하던 준식과 그의 부인은 “우리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냐”며 울부짖고 혼돈스러워한다. 관객에게 끊임없이 ‘삶의 방향’에 대해 질문한다.
작품은 이에 대한 답을 쉽사리 내놓지 않는다. 모든 인물이 걸어온 길을 보여줌으로써 삶의 방향을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드는 데 작품의 매력이 있다. 과거 준식의 부모가 차비를 아끼기 위해 나이를 속이거나 자식에게 시킨 도둑질마저 긍정하는 장면은 비참함보다는 연민을 느끼게 한다. 신유청 연출가는 “가야 할 방향도 모른 채 길 위에서 고개를 숙여 한숨을 내쉬던 그들(부모 세대)을 떠올렸다”고 밝혔다.
파노라마처럼 가로로 길게 꾸며 한국의 근대를 조망하는 듯한 무대 구성이 돋보인다. 무대 안에서는 똥밭, 공사장, 아파트 거실의 경계를 불명확하게 설정해 혼란스러운 개인과 사회를 표현했다. 주요 배역과 함께 무대를 구성하는 ‘1인 다역’의 ‘소리들’ 배역이 이따금씩 등장해 이야기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지만 이마저도 삶의 가치를 놓고 혼란스러워하는 우리네 모습을 그린 것으로 볼 수 있겠다. 8일까지 서울 종로구 두산아트센터 Space111. 3만5000원. 14세 관람가.★★★☆(★ 5개 만점)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