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예금을 가입하러 은행에 갔는데 1년 만기와 10년 만기 상품이 있다. 만약 두 상품의 금리가 같다면 무엇을 택해야 할까.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고객이라면 당연히 1년 만기를 고를 것이다. 일단 1년을 맡겨보고 다시 어디에 투자할지 판단해야지, 이자율도 같은데 굳이 10년간 돈을 묶어놓을 이유가 없다. 만기가 너무 길면 급한 일이 생겨도 돈을 꺼내 쓰기 어렵고, 좋은 투자 기회도 흘려보내야 한다. 또 그사이 물가가 계속 오르면 은행에 맡긴 내 돈의 가치도 저절로 떨어진다.
금융시장에서 장기 금리가 단기 금리보다 항상 높게 형성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오랫동안 돈을 맡기는 대신 그만큼 이자를 더 쳐주겠다고 해야 비로소 ‘그래? 그렇다면…’ 하며 고민하는 투자자가 생긴다. 그런데 요즘 금융시장에서는 이런 통념을 뒤엎는 기현상이 관찰되고 있다. 장기 금리가 단기 금리 밑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주엔 3년, 5년은 물론이고 20년, 30년짜리 초(超)장기 국고채 금리가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아래로 추락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이자는 적게 받아도 상관없으니 10년이든 20년이든 내 돈을 안전하게만 지켜 달라’는 투자자가 늘었다는 뜻이다.
이런 ‘장단기 금리 역전’은 경제 전망이 아주 나빠졌다는 신호라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다. 왜 그럴까. 우선 역으로 경기 전망이 좋은 경우를 가정해 보자. 그러면 사업이나 투자 기회가 많아지고, 그에 따라 돈에 대한 수요도 늘어난다. 자연히 예금이나 채권 금리도 따라 오를 것으로 기대하게 된다. 반대로 미래를 비관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이미 갖고 있는 돈이라도 잘 지키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경제 성장과 투자가 부진한 만큼, 물가나 금리도 계속 제자리를 맴돌거나 내려갈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본다면 낮은 금리에 돈을 오래 묻어두는 것도 그리 이상한 선택이 아닐 수 있다.
정부와 한은은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에도 그리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반응해 왔다. “시장이 너무 앞서가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마치 우리 경제는 멀쩡한데 괜히 시장이 오버하고 있다는 식이다. 하지만 그렇게 넘겨버리기엔 최근 우리 주변에서 보이는 ‘경제 비관(悲觀)’의 양상은 심각한 수준이다. 시중은행에선 달러 예금이 눈에 띄게 늘었고 골드바는 품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해외 주식과 부동산에 대한 투자 설명회도 항상 만원이다. 정부의 거듭된 부인에도 화폐개혁설 등 각종 괴담이 유튜브 등에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다.
이런 불길한 현상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우리 경제와 정부 정책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가 깨졌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 시장의 불안심리가 일부 과장돼 나타난 측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이를 과민반응이나 정치 공세로 치부할 일은 아니다. 7년 만의 경상수지 적자 가능성, 반년째 수출 감소, 외국인 주식 매도 등 객관적 지표들이 그 엄연한 근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대통령은 “경제가 성공으로 가고 있다”고 했지만 시장은 “그 길이 아닐 수 있다”는 경고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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