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피아니스트’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유대계 폴란드 감독 로만 폴란스키(86). 반미 성향으로 유명한 그는 2010년 미국과 영국의 관계를 신랄하게 풍자한 ‘유령 작가(The ghost writer)’를 만들었다.
이 영화에는 여론을 거스른 이라크전 참전 후폭풍으로 사퇴한 전직 영국 총리 애덤 랭이 등장한다. 그는 재직 중 미국의 요구로 테러 용의자인 무슬림계 영국인을 불법 고문한 사실이 드러나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될 처지다. 대부호가 소유한 외딴섬에서 사실상 유배 생활을 하지만 군인 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한 아버지가 이곳까지 찾아와 그를 죽인다.
놀라운 사실은 랭의 죽음 후 드러난다. 그의 부인은 대학생 때 미 중앙정보국(CIA)에 포섭된 요원이었다. 그는 아내의 조종하에 미국 꼭두각시 노릇만 하다 저세상으로 갔다. 두 아이를 낳으며 수십 년을 함께한 동반자가 미 스파이란 사실도 모른 채.
랭의 실제 모델은 누구나 짐작하듯 조지 W 부시 전 미 대통령의 ‘푸들’로 불린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다. 2004년 그와 부시의 공동 기자회견 때 한 기자가 “진짜 푸들이 맞느냐”는 돌직구를 날렸다. 그는 부시가 입을 열기도 전 “맞다고 답하면 내가 곤란해진다”는 농으로 받아쳤다. 블레어인들 미 대통령의 애완견 노릇이 좋았을까. 하지만 냉엄한 국제 정치의 현실을 그 순간보다 생생히 알려주기도 힘들 것이다.
‘정치적 연인(戀人)’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과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관계도 비슷했다. 생전 둘은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공식 석상에서 다정하게 춤을 췄다. 반(反)공산주의, 작은 정부란 가치도 공유했다. 그런 둘 사이에도 분명한 서열이 존재했다. 1983년 미국은 카리브해 작은 섬나라 그레나다를 침공했다. 영연방인 이곳에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은 공산 쿠데타가 일어났다. 침공 후 레이건은 대처에게 “우리 쪽 보안을 믿을 수 없어 미리 알려주지 못했다”고 했다. 대처는 이렇게 말했다. “이 전화도 도청 위험이 있으니 빨리 끊자. 전화해줘 고맙다.” 미국의 뒤늦은 ‘통보’에 영국은 ‘감동’했다.
3∼5일 영국을 국빈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곳곳에서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메건 마클 왕손빈과 사디크 칸 런던 시장에 대한 막말, 4명의 자녀와 그 동반자까지 대동한 호화 가족 여행 논란은 새롭지 않다. 내정 간섭은 다르다. 영국에 합의 없는 유럽연합(EU) 탈퇴, 즉 노딜 브렉시트를 종용하고 ‘영국의 트럼프’ 보리스 존슨 전 외교장관을 차기 총리로 미는 건 명백한 주권 침해다. 하는 사람도 당하는 쪽도 다 문제다.
그는 왜 존슨 전 장관을 두둔할까. 금발의 백인 남성, 유복한 가정환경, 난잡한 사생활 등 둘의 공통점에 동질감을 느껴서? 국빈방문 하루 전인 2일 우디 존슨 주영 미국대사가 BBC와 가진 인터뷰에 답이 있다. 존슨 대사는 현재 EU가 수입을 금지한 염소(鹽素)로 소독한 미국산 닭고기, 호르몬제를 먹인 미국산 쇠고기 등을 브렉시트 후 미영 무역협상 의제에 포함시키라고 포문을 열었다. “매년 500만 명의 영국인이 미국에 오지만 치킨에 대한 어떤 불만도 들어본 적 없다. 미국산 식품은 완벽히 안전하다”는 말과 함께.
즉, 하루라도 빨리 EU를 벗어나지 못해 안달인 ‘골수 브렉시트 지지자’ 존슨이 런던 다우닝가 10번지(영국 총리관저)의 새 주인이 될수록, 미국은 영국을 미국산 농식품의 새로운 시장으로 만들 수 있다. 영국 식료품의 EU 의존도가 30%에 달하기 때문. 특히 미중 무역 갈등으로 중국이 미국산 대두 수입을 금지하겠다고 난리치는 상황에서 핵심 지지층인 농가의 불만을 잠재우면 트럼프 본인도 4년 더 백악관 주인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나라면 EU에 500억 달러(약 60조 원)의 이혼 분담금을 내느니 하루라도 빨리 노딜 브렉시트를 선택하겠다”는 트럼프의 발언은 영국의 정치 혼란마저 자신의 재선 도구로 삼겠다는 노골적 바람이다.
존슨은 트럼프의 기대에 부응할까. 4월 한 설문조사에서 영국인의 54%는 “법을 어기더라도 강력함을 보여주는 지도자를 원한다”고 했다. 영국인이 브렉시트 혼란에 진저리를 칠수록 ‘영미 트럼프’가 ‘꿀 케미’를 보여줄 날이 머지않은 듯하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