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권에 있는 한 공공기관 인사팀 소속인 40대 여성 A 씨는 올 3월 사내 강사로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을 하다 남성 상사가 여직원 가슴을 쳐다보는 삽화가 담긴 자료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여성가족부가 제작한 성희롱 예방 교육 사례모음집이었다. 삽화에는 ‘직원의 몸을 쳐다보거나 평가하면 안 된다’고 적혀 있었다. A 씨가 “쳐다보는 건 괜찮다. 안 그럼 다 잡혀가란 소리냐”고 하자 직원들은 크게 웃었다. 그러나 피해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꼈다면 가슴 등 특정 신체 부위를 쳐다보는 행위는 성희롱에 해당된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은 2014년부터 모든 직장에서 여가부의 사례모음집을 참고해 1년에 1회 이상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법률상 강사에 대한 규정이 따로 없어 요식행위처럼 이뤄지는 사례가 적지 않다. 통상 성희롱 예방교육 경험이 일천한 사내 인사팀 직원이나 고위 간부가 사례모음집을 들고 교육하다 보니 도리어 성희롱적 발언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공기업에 다니는 B 씨(31)는 4월 팀장 주도로 회의를 하다가 시간을 쪼개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았다. 강사를 맡은 팀장은 ‘술자리에는 역시 여직원이 있어야지’라는 발언은 성차별적이라고 적시한 교본을 보더니 “이게 왜 문제냐? 이 말도 못하면 아무 말도 못한다”고 말했다. 이어 여직원들에게 “별게 다 문제네. 너희도 이게 불편하냐”고 따지듯 물었다. B 씨를 비롯한 팀원들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교육은 그렇게 8분 만에 끝났다.
디자인 중소기업에 다니는 C 씨(25·여)는 지난해 12월 회사 강당에서 부사장 주도로 열린 성희롱 예방 교육만 생각하면 비참해진다. 부사장이 “‘술은 여자가 따라야 한다’는 말은 성차별적 발언”이라는 교본 내용을 읽었을 때였다. 직원들과 함께 교육을 듣던 대표가 여직원들을 둘러보며 “강제로 시킨 게 아니라 너희들이 알아서 따른 거 아니야”라고 말했다. C 씨를 비롯한 여직원들은 마지못해 웃으며 “저희가 좋아서 한 거죠”라고 답해야 했다.
성범죄 피의자를 주로 변호해 온 변호사가 강사로 나서는 일도 있다. 대기업 계열사의 성폭력 예방교육 강단에 선 D 변호사는 “여직원이 아무리 예뻐도 동의 없이 스킨십을 하시면 좀 위험할 수 있다”며 줄곧 가해자 편에서 말했다. 교육 후에는 “혹시 성범죄로 고소당하면 저한테 연락하라”며 남직원 약 80명에게 명함을 돌렸다.
직장 내 성희롱 피해 건수는 늘고 있다. 직장에서의 남녀평등을 목표로 하는 민간단체 한국여성노동자회에 따르면 직장 내 성희롱 상담 건수는 2014년 416건에서 지난해 763건으로 훌쩍 뛰었다. 여가부의 ‘2018년 성희롱 실태조사’ 결과 지난 3년간 여성 근로자의 8.1%가 직장 내 성희롱을 겪었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 교육 강사 자격을 법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회 여성가족위원회 소속 자유한국당 신보라 의원은 지난해 8월 고용노동부 장관이 승인한 전문 강사 등에게 성희롱 예방교육을 맡기는 내용의 남녀고용평등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김경희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성인지 감수성을 가진 전문가가 교육해야 성희롱과 성폭력 개념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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