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60화> 경북 영덕
‘경상북도에서 불령자(일제가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의 망동 중에 가장 맹렬했던 영해·영덕지방을 시찰하고 돌아온 경무부장의 말을 들은즉 영해·영덕지방의 망동소요는 대단히 맹렬했으나 요새는 모두 종식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1919년 5월 31일자에서 두 달 전 3·1운동으로 시끄러웠던 경북 영덕군의 민심이 진정됐다며 이같이 보도했다. 총독부 기관지가 ‘경북에서 가장 맹렬했다’고 소개할 정도로 영덕지역의 3·1운동은 실제로 매우 격렬했다.
영덕 만세운동이 집중적으로 펼쳐진 3월 18일과 19일 이틀간 주민들은 돌 몽둥이 도끼 등을 이용해 지역 주재소와 면사무소 여러 곳을 부쉈다. 총기로 무장하고 진압에 나섰던 일제 경찰들은 ‘포로’가 되는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삼국시대 이후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리면서 뿌리 깊이 박혀 있던 영덕지역 주민들의 반일·항일 의식이 만세시위로 폭발한 것이다. 영덕은 또 1906∼1908년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펼쳐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의병장 신돌석(1878∼1908·건국훈장 대통령장)의 고향(현 영덕군 축산면·당시는 영해군)이기도 하다.
일단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된 사람들 규모가 압도적이다. 1919년 12월 말 조선주차헌병대사령부 보고서에 따르면 그해 3·1운동으로 경북에서 붙잡힌 사람은 모두 2133명인데, 영덕이 489명으로 가장 많았다. 안동(392명), 대구(297명), 의성(190명)이 뒤를 이었다. 일제 경찰이 자신이 당한 망신을 앙갚음하기 위해 대대적인 체포 작전을 펼친 까닭이다. 영덕군민 209명이 재판에 회부됐고 절반 이상인 112명(53.6%)이 징역 1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특히 시위가 격렬했던 영해·병곡·축산·창수면 등 북부 4개면에서는 170명이 무더기로 재판에 넘겨졌다.
○ 기독교와 유림 세력이 주도
고종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던 영덕의 기독교 인사와 유림들이 서울에서 3·1운동을 목격한 뒤 귀향하면서 영덕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도화선에 불을 붙인 사람은 지품면 낙평동의 교회 조사(전도사)였던 김세영이다. 그는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만세시위로 학교가 휴교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듣고 곧바로 귀향했다. 김세영은 3월 12일 친분이 있던 전 구세군 참위 권태원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자결주의가 채택됐다는 소식을 전하며 이렇게 당부했다.
“우리 민족도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해 독립을 청원하고 있다. …우리 지역에서도 동지를 규합해 독립만세운동을 하면 어떠한가. 나는 여러 사정이 있으니 권 형이 병곡면 송천동 교회 조사 정규하와 상의해 영덕면에서 거사를 해주기 바란다.”(‘영덕의 독립운동사’)
권태원이 3월 15일 정규하를 만나 김세영의 계획을 전하자 정규하는 “영덕면에서 만세를 부르는 것은 좋지 않다. 내가 인솔하는 송천리 부근의 야소교도(기독교도)와 이름이 알려진 선비들을 규합해 3월 18일 영해시장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겠다”며 대안을 제시했다. 권태원도 이에 순순히 동의했다.(‘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영해 3·18독립만세운동 기념사업회’ 김수용 회장은 영해가 거사 장소로 정해진 이유에 대해 “영해군을 영덕군에 편입시킨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덕면이 군청 소재지가 됐지만 영해·병곡·축산·창수면이 사회·경제·문화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인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토착 향반인 권, 남, 박, 백, 이 등 5성(姓)의 양반과 유지들이 영해면 등 북부 면에 거주하고 있었고, 당시 경북 동해안 최대 시장이었던 영해시장에 더 많은 인파가 몰렸던 점도 영향을 미쳤다.
○ 일제를 놀라게 한 3·18 영해만세시위
거사일인 3월 18일 아침부터 영해면 성내시장에 크고 작은 태극기를 휴대한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오후 1시쯤에는 그 수가 3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장을 누비며 만세시위를 펼친 시위대는 일제 경찰들이 있는 주재소를 둘러싸고 만세를 외치며 세를 과시했다. 인근 공립보통학교로 몰려가 학생들에게 함께 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다가 응하지 않자 훈도(교원)를 끌고 주재소로 돌아갔다. 이들은 일본 순사와 순사보에게도 독립만세를 외치라고 호통을 쳤다. 위세에 제압당한 일경은 순순히 만세를 외쳤다.(‘영덕의 독립운동사’)
이때 일본인 순사부장이 나타나 거만한 태도로 시위대에 해산을 요구하며 대형 태극기를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이에 흥분한 군중이 주재소로 밀고 들어가 유리창과 가구들을 부수고 서류를 찢어버렸다. 이후 시위는 공격적으로 바뀌었고, 시위대는 순사부장을 붙잡아 때리고, 상의를 갈기갈기 찢었다.
주재소를 박살낸 시위대는 공립보통학교로 향했다. 일제 재판기록에 따르면 시위대는 학생들에게 “생도가 만세를 부르지 않는 것은 교원의 애국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성토했다. 시위대는 교사(校舍)의 지붕과 기둥만 남기고 대부분 파괴했다. 이어 일본인들이 다니는 공립소학교로 쳐들어가 학교 건물을 부수고 학적부와 공문서를 파기했다. 면사무소도 유리창이 깨지고 집기가 부서졌다.
이후 시위대 안에서는 “병곡면에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자”는 주장이 나왔다. 이에 정규하가 이끈 시위대 400∼500명은 8km 떨어진 병곡면으로 이동해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때려 부쉈다.
김진호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연구원은 이에 대해 “일제가 먼저 시위 주도 인사를 체포, 구금하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시위대가 주재소를 공격하는 게 일반적인 순서”라며 “처음부터 공격적인 운동이 전개된 것은 항일 의식이 강한 영덕군의 지역적 특수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얻어맞고 포로 신세가 된 일제 경찰서장
“폭도 1000여 명이 영해주재소로 몰려왔다”는 보고에 영덕경찰서장은 순사와 순사보 4명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16km를 달려와 이날 오후 3시 반경 영해주재소에 도착했다. 서장 일행이 가져온 총기로 무장한 일경들은 시장 부근에서 휴식 중이던 시위대에 해산을 요구했다.
하지만 시위대는 오히려 이들을 둘러싸고 압박했고, 위협을 느낀 서장 일행은 주재소 안으로 피신했다. 쫓아온 시위대가 무기 탈취를 시도하고 폭행을 가하자 서장 일행은 다시 경찰서가 있는 영덕면 방면으로 달아나기 시작했지만 멀리 가지는 못했다. 서장과 순사는 영해면과 영덕면 사이에 있는 축산면 상원동에서 추격조와 축산면 주민 등 100여 명에게 붙잡혔다.
이 과정에서 서장은 속옷과 제복이 찢어졌고, 뒤로 넘어지면서 머리가 깨져 한때 정신을 잃기도 했다. 당시 재판기록에 따르면 서장은 전신 16곳에 상처를 입었다. 서장 등 3명은 영해면으로 다시 끌려와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관에 감금됐다.
○ 일본군의 집단 발포로 영해 만세시위 막 내려
경북에서 소요가 가장 맹렬했던 영해·영덕지방의 민심이 평정됐다고 전한 매일신보의 1919년 5월 31일자 기사.
시위대는 일제 경찰을 몰아내고 영해면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해방감에 들떴다. 시위 지도부는 3월 18일 영해면과 병곡면 시위가 끝나자 19일에도 시위를 계속하기로 정하고 시위 참가자들에게 “내일도 똑같이 만세를 부른다”고 알렸다. 19일 아침부터 영해면 시장 부근에 600∼700명이 모여들었고, 만세운동은 재개됐다.
오전 11시경 포항헌병분대장 등 헌병 6명이 영해에 도착했다. 이들은 15시간 이상 여관에 감금돼 있던 서장을 구출했지만 시위대의 위세에 해산을 시도하지 못하고 물러갔다. 오후 4시경 대구에 주둔하던 80연대 병력 22명이 영해 땅을 밟으면서 일제의 진압작전이 본격화됐다. “폭도들이 영해의 주재소와 학교 등을 파괴하고 전화를 불통 상태로 만들었다”는 보고를 받은 도장관이 80연대의 영덕 출동을 결정한 것이었다.
이들은 대구에서 포항까지 자동차로 이동한 뒤 기선을 타고 영덕에 도착했다. 남산에 진을 친 80연대 병력과 포항헌병대, 일경은 시위대에 해산을 명령하고 공포탄을 쐈지만 시위대는 위축되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이어갔다. 마침내 일본군은 실탄 사격을 시작했고, 현장에서 8명이 순국하고 16명이 부상당했다. 3·18 영해시위에 자극받아 3월 19일 창수면에서도 주재소 공격이 일어났다.(‘영해 3·18독립만세의거사’)
▼ 만세시위로 남편들 체포되자 바통 이어받아 시위 주도 ▼
여성 독립유공자 윤악이-신분금,부부 함께 독립운동 주도 ‘전국 유일’
경북 영덕군 만세시위는 여성들이 크게 활약한 시위라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지금까지 3·1운동과 관련해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경북 여성은 모두 6명. 안동시, 경주시, 구미시, 칠곡군에서 한 명씩 나왔고 영덕군은 두 명이다. 영덕군 지품면 원정동의 북장로교 신자였던 윤악이(1897∼1962·대통령표창)와 신분금(1886∼미상·대통령표창)은 남편들이 만세시위로 체포되자 이를 계기로 시위에 적극 가담한다.
윤악이의 남편 주명우(건국훈장 애족장)는 1919년 3월 19일 지품면 원정동 장날 시장에서 동료 기독교인 1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 만만세’라고 적은 종이 깃발을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시위 주동자였던 주명우는 “한국 독립의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죽어도 멈추지 말라”고 연설하다 체포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대한의 독립을 축하했다는 이유로 징역 2년을 선고한 것의 부당함을 따진 뒤 “몸은 강탈할 수 있으나 마음은 진실로 불복한다”며 기백을 굽히지 않았다. 신분금의 남편 김태을(대통령표창)은 3월 18일 강우근이 주도한 영덕면 남석동 시장 시위에 참가했다 체포돼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아내들도 남편의 기백에 뒤지지 않는 당당함을 보였다. 자품면 원정동 장날인 3월 24일 윤악이는 남편의 뜻을 대신 이루겠다는 듯 신분금에게 “오늘 여기 시장에서 독립운동을 하자”고 제의했고 신분금도 이에 동의했다.
윤악이는 시장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우리는 여자이지만 한국의 독립을 희망하여 한국 만세를 부른다”고 말한 뒤 만세를 외쳤다. 신분금도 군중을 이끌며 만세시위를 벌였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악이와 신분금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각각 징역 8개월과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들처럼 부부가 같이 독립운동을 주도한 사례는 영덕이 전국에서 유일하다는 게 영덕지역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강윤정 경북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장은 “자신들도 체포될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윤악이와 신분금이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은 당시로서는 선택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