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대갈이 수법 부를 혁신금융 [오늘과 내일/김광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20일 03시 00분


특허시장도 없는데 특허를 담보로 잡으라니
생색은 정부가 내고, 최종 피해는 고객이 볼 수도

김광현 논설위원
김광현 논설위원
이전 정부 시절이었던 2014년 이른바 창조금융이란 모토 아래 기술평가신용(TCB) 대출 제도가 도입됐다. 기술력이 우수하지만 담보력이 미약한 창업 초기 기업에 대해 무담보 무보증 대출을 확대하자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수시로 개별 은행들의 실적을 체크해 줄 세우고 유무형의 각종 불이익을 주곤 했다.

그러자 정부에 정책이 있으면 민간에는 대책이 있다는 말처럼 각 은행들 본점에서는 일선 지점에 TCB 대출을 어떻게든 최대한 늘리라는 지침을 내렸다. 일선 창구에서는 기존 신용대출을 포함해 바꿀 수 있는 여신은 모두 TCB 항목으로 바꾸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말하자면 값싼 중국산 쌀이나 조개를 한국산 포대에 담아 파는 식의 ‘포대갈이’ 수법이 동원된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관계형 대출’이란 제도도 도입됐다. 신용등급이 낮아도 기업 대표의 도덕성, 경영 의지, 성장성 등을 평가해 중소기업에 대출해주는 제도다. 은행들은 속으로 전형적인 탁상행정, 관치금융이라고 비웃었지만 한편으로는 기존 신용대출을 관계형 대출 항목으로 갈아타는 방법 등을 통해 실적도 맞추고 금융당국의 비위도 맞췄다.

하늘 아래 새로운 정책은 없는 모양이다. 금융위원회가 얼마 전 혁신금융 추진방향을 발표했다. 핵심적인 내용 가운데 하나가 기업여신 시스템을 혁신적으로 뜯어고치겠다는 ‘일괄담보’ 대출 제도다. 재고자산 기계설비 같은 동산(動産)은 물론이고 특허권, 기술력, 성장성 같은 무형의 자산도 담보로 인정해 적극적으로 대출을 해주라는 취지다. 부동산 담보 위주의 전당포식 대출에서 벗어나 신용 대출로 가자는데 누가 반대할 것인가. 이전 정책들처럼 언제나 문제는 당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있고, 취지보다는 실행의 디테일에 있다.

은행들은 이번에도 ‘취지 공감, 실행 곤란’이라며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으로만 답답해하고 있다. 아무리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IoT)이 잘 발달됐다고 해도 은행이 거래 기업의 재고를 일일이 어떻게 파악할 수 있으며, 특허권을 담보로 잡았다가 해당 기업이 부실화되면 그 특허권을 어디에서 처분하느냐는 것이다. 아직 우리나라에 특허시장은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미미하다. 은행이 담보로 얻은 특허권으로 사업을 할 것도 아니고 건전성 악화로 이어질 소지가 크다.

여신 실무자들은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 ‘일괄담보’에 바꿔 담을 각종 대출 물건을 추리고 있다고 한다. 최근 만난 중소기업 대표 몇 명에게 새 기업여신제도의 취지와 내용을 설명해주고 어떨 것 같으냐고 물어보니 한결같이 어느 먼 나라 이야기냐는 반응이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간 게 영세 자영업자 맞춤형 대출이다. 신용은 양호하지만 매출액이 적고 담보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가 주요 대상이다. 은행들의 사회공헌자금도 적극 활용하라고 한다. 정책금융을 넘어 최저임금 인상의 부작용을 땜질하는 정치금융 냄새가 물씬 풍긴다. 생색은 금융당국이 내고 리스크는 은행이 진다. 그 리스크의 최종 피해자는 고객이다.

예나 지금이나 은행에 금융당국은 영원한 상전이다. 금융당국이 제시하는 목표는 어떻게든 맞추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현실적인 신용 인프라가 충분치 않은 상황이라면 은행들은 실적 맞추기를 위해 편법이라도 동원할 수밖에 없다. 장부상 선진 금융이 아니라 실제 한 단계 높은 대출문화를 가져오려면 정책적 목표 제시와 함께 금융 생태계를 뜯어고치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기술평가신용 대출#포대갈이#일괄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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