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저녁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삼성그룹 영빈관 ‘승지원’으로 사우디아라비아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일행의 차량이 들어가고
있다. 이날 저녁 늦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국내 5대 그룹 총수가 이곳에서 단체 회동했다. 허동준 기자
hungry@donga.com
사우디아라비아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방한을 맞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수석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구광모 LG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등 5대 그룹 총수들이 26일 저녁 삼성그룹 영빈관인 ‘승지원(承志園)’에 모였다. 재계 총수들이 승지원에서 모인 것은 2010년 10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만찬 이후 약 9년 만이다.
총수들은 이날 오후 7시 반경 승지원에 먼저 모여 청와대 만찬을 마치고 온 무함마드 왕세자를 함께 기다렸다. 승지원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87년 이병철 선대회장의 거처를 물려받은 뒤 집무실 겸 영빈관으로 개조해 써왔다. 그동안 승지원에서 삼성 사장단 회의 및 주요 투자계획 발표 등이 이뤄졌으며, 삼성을 찾는 국내외 주요 손님을 초대하는 공간으로도 활용돼 왔다.
이날 모임은 이 부회장이 왕세자와 총수들을 승지원으로 초대해 이뤄졌다. 이 부회장은 왕세자에게 승지원의 역사를 설명하며 9년 만에 승지원에서 재계 총수들이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준 데에 감사의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 관계자는 “회동이 왕세자 숙소나 외부 행사장이 아닌 승지원에서 이뤄진 것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삼성과의 협력에 거는 기대감을 보여 준다”며 “왕세자가 이 부회장이 제시한 인공지능(AI)과 5세대(5G) 통신기술 및 시스템반도체 등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날 이 부회장은 단체 회동이 끝난 직후 왕세자와 승지원에서 개별 면담도 별도로 가진 것으로 전해졌다.
사우디의 파격적 경제개혁을 이끌고 있는 실권자의 방한에 5대 그룹뿐 아니라 대한민국 재계가 이날 하루 종일 들썩였다. 사우디는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정보통신기술(ICT) 중심의 첨단 산업 위주로 국가 경제 구조를 개편하겠다는 ‘비전 2030’을 2016년 발표하고 565조 원을 들여 ‘미래형 신도시’ 건설을 계획 중이다. 이 때문에 왕세자의 방한에 앞서 주요 기업마다 몇 주 전부터 ‘신중동 특수’를 준비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무함마드 왕세자의 공식 오찬에는 국내 4대 그룹 총수뿐 아니라 조현준 효성 회장과 정기선 현대중공업 부사장, 박동기 롯데월드 사장, 최병환 CGV 사장 등 기업인들도 참석해 무함마드 왕세자에 대한 한국 기업들의 높은 관심을 보여줬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이날 오후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에쓰오일의 잔사유고도화시설(RUC), 올레핀다운스트림센터(ODC) 준공식에도 문 대통령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약 5조 원이 투자된 이번 프로젝트는 사우디 국영 석유기업인 아람코가 단독 대주주가 된 이후 진행한 첫 대규모 투자다. 한국 정유, 석유화학산업 사상 최대 투자 규모이기도 하다.
아람코는 2024년 완공을 목표로 7조 원을 투자하는 2단계 프로젝트에 대한 협업 양해각서도 이날 에쓰오일과 교환했다. 10년간 한국 석유화학 사업에 12조 원을 쏟아붓는 것이다.
아람코는 에쓰오일 외에도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GS 등 7개 기업과도 협력을 약속했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은 전날 서울 여의도 콘래드호텔에서 아민 나세르 아람코 최고경영자(CEO)와 만나 수소에너지 및 탄소섬유 소재 개발 협력 강화에 대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아람코가 현대자동차와 수소에너지 분야에서 전략적 협력을 맺기로 하면서 사우디에 현대차가 만든 수소전기차가 공급될 것으로 전망된다. 두 회사는 국내 수소충전 인프라와 사우디의 수소전기차 보급 확대를 함께 추진하고 보다 견고한 수소탱크 생산과 차량 경량화 등에서도 손을 맞잡기로 했다.
아람코는 현대중공업과는 킹살만 조선소 내 선박엔진공장 설립 계약 및 두 회사가 참여하는 합작회사인 IMI의 지분을 늘리는 계약 등을 맺었다. 이 외에도 현대오일뱅크와는 원유공급 계약을, 한국석유공사 효성 GS 대림산업과도 생산시설 건립 등에 대해 양해각서를 맺었다. 사우디 석유화학기업 APC의 자회사인 AGIC도 SK가스와 18억 달러 규모의 신규 공장 합작투자에 대해 협력하기로 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이번에 무함마드 왕세자의 방한을 계기로 사우디 기업과 국내 기업들이 맺은 계약이나 양해각서의 총 규모는 약 83억 달러(약 9조6000억 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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