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의 길을 걷는 내내 문학이 그리웠습니다. 20년 넘게 소방관으로 일한 지금은 두 길이 다르지 않게 느껴집니다. 일하면서 부대낀 사람과 그들이 건넨 사연이 제 속에서 영글어 이야기로 꽃피웠다는 걸 알거든요.”
21일 서울 종로구 청계천변에서 만난 박이선 전북군산소방서 현장안전점검관(50). 그의 손에는 다섯 번째 장편 ‘궁정동 사람들’(나남·1만4800원)이 들려 있었다. 1979년 10·26사태가 일어난 하루를 담담한 시선으로 훑은 작품이다. 》
그는 전북 남원시 지리산 산골에서 자랐다. 몰락한 선비였던 조부의 어깨 너머로 글을 깨치고 한학을 익혔다. 물놀이보다 책이 좋았지만, 인근에는 도서관도 서점도 없었다. 누군가 한두 권씩 보태둔 허름한 교실 문고를 읽어치우며 지적 허기를 달랬다.
‘문청’을 꿈꿨지만 방송통신대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형편상 취업에 쓰임새가 있는 공부를 해야만 했다. 군대에 다녀온 직후 그의 눈에 소방공무원 시험 공고가 들어왔다. 하지만 화염 속을 드나들면서도 오래 문학열병을 앓았고, 2015년 끝내 꿈을 이뤘다. 단편 ‘하구’로 전북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등단하거나 작품을 내지 않아도 작가처럼 읽고 쓰는 이들이 적지 않아요. 초년병 시절 저와 소방서 동료들도 그랬습니다. 문예집을 만들어 시, 소설, 수필을 싣고 돌려봤지요. 군산 월명산 이름을 딴 ‘월명소방’에 소설을 내면서 혼자 이야기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박 작가는 등단 전후로 ‘이네기’ ‘이어도 전쟁’ ‘여립아 여립아’ 등 역사 장편소설을 내리 써냈다. 최근 7년간 쓴 장편은 3권이다. 주요 관심사는 역사나 군사, 안보. 그는 “역사를 특히 좋아한다. 책과 전문가의 도움도 받지만 역시 최고의 스승은 기록이다. 광개토대왕릉비도 한자를 하나하나 연구해 전체 맥락을 살폈다”고 했다.
‘궁정동 사람들’을 구상한 건 2016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아닌 박흥주 육군 대령을 주인공으로 세웠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왼팔이자 엘리트 군인으로, 사건에 연루된 6명 가운데 가장 먼저 처형된 인물이다. 그는 “박 대령으로부터 보통 사람의 고민을 읽어냈다”고 했다.
“집에는 어린 자녀와 병약한 아내가 있고, 사살 대상은 형제처럼 지내던 경호원들이고. 사건 30분 전에 그를 괴롭혔을 생각들을 떠올려봤습니다. 한참 상상하다 보니 이런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직장에서는 소중한 것들을 제쳐두고 일 생각만 하게 되는데, 교육받은 대로 훈련받은 대로 행동한 건 아닐까 하고요. 소방관들도 긴급한 상황에서는 반사적으로 매뉴얼을 따르거든요.”
소설을 통해 그가 말하고 싶었던 건 ‘선택의 문제’다. 개인이 상관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선택을 하고, 시대의 사건에 휘말리는 과정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었다고 한다.
박 작가는 늦깎이 소설가인 만큼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잔뜩 쌓여 있다. 그는 “탄광 노동 소설은 거의 마무리됐고, 천재 음악가이자 소설가인 홍난파 선생의 이야기에도 마음이 간다. 발굴되지 않은 역사 속에서 따듯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캐내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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