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 시민을 줄 세울 때[오늘과 내일/박용]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6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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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출정식 세 과시한 트럼프 캠프… 시민 희생 당연시 선거 마케팅은 위험

박용 뉴욕 특파원
박용 뉴욕 특파원
18일(현지 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020년 대선’ 출정식이 열린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날씨는 트럼프 대통령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폭우가 쏟아지다가 해가 뜨더니 70%가 넘는 습도와 30도가 넘는 찜통 무더위가 닥쳤다. 서 있기만 해도 등골에 땀이 흘러내렸다.

주최 측은 행사 흥행을 위해 지지자들을 줄 세우겠다고 작심한 듯했다.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행사장 입장 티켓을 무제한 발급하고 선착순으로 입장을 시킨다고 했다. ‘등록자가 7만 명을 넘었다’ ‘10만 명이 됐다’고 알리는 트럼프 대통령의 홍보 트윗을 본 지지자들의 마음은 급할 수밖에 없었다. 행사가 시작되기 40시간 전부터 입장을 위한 지지자들의 줄이 늘어선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기업들은 맛집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럭셔리 브랜드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줄을 세운다. 사람들은 ‘선전 전략’을 뻔히 알면서도 거부하지 못하고 빨려드는 ‘선전의 역설’에 빠진다. 그런 ‘마케팅 상술’이 민주주의 꽃인 선거 판까지 흔드는 건 오래된 일이다.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예고됐는데도 땡볕에 서 있어야 하는 지지자들을 배려한 그늘은 없었다. 기자가 낮 12시부터 줄을 서서 오후 5시경 행사장 입구까지 가는 동안 눈앞에서 4명이 쓰러졌다. 한 여성은 백지장처럼 얼굴이 하얗게 바뀌어 휠체어에 실려 갔다. 다른 이들은 들것에 실려 나갔다. 인파를 뚫고 긴급 환자를 이송하는 구급 요원들도 진땀을 흘렸다. 이런 상황에서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 미국인들의 정치적 열정과 인내심이 놀라울 뿐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 날 워싱턴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그곳(출정식 행사장) 밖에 입장을 하지 못한 수만 명이 있었다”고 말했으나, 지역 언론인 올랜도센티널은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 약 1시간 전 행사장 앞 긴 줄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집회 시작에 맞춰 행사장에 쉽게 걸어 들어갈 수 있었다”고 전했다. CBS 레이트쇼는 기다리던 사람들이 두고 간 의자와 짐만 덩그렇게 남아 있는 행사장 밖의 분위기를 전했다. 오래 줄을 서지 않아도 대부분이 입장할 수 있었던 셈이다.

20세기 최고 홍보 전문가로 꼽히는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한때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수단이었던 대중 강연은 현대사회에서 그 가치가 달라졌다”며 “선전의 관점에서 강연의 중요성은 파급력에 있다”고 말했다. 강연 자체보다 강연이 미디어 등을 통해 대중에게 어떻게 알려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설파한 것이다. 지지자들의 줄을 세워 세를 과시한 트럼프 대통령과 대선 캠프는 이 원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지지자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록 스타처럼 생각하고 열광하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잊혀진 시민’을 대신해 워싱턴의 기성 정치권을 비판하는 그의 ‘아웃사이더’ 전략은 기성세대의 주류 문화에 저항하는 반문화의 기치를 든 록 스타처럼 대중의 마음을 흔드는 묘한 구석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연설에서도 지난 대선을 “여러분의 희생으로 자신들의 부를 불린 정치 계급으로부터 정부를 되찾아 오는 기회”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재선 도전 현장에서 지지자들의 희생을 당연시하며 세를 과시하는 듯한 선거 마케팅은 사소한 일일 수 있으나 권력의 본심이 어디에 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이날 행사가 끝난 뒤에 만난 지지자들은 세뇌된 것처럼 한목소리로 “의회와 언론에 포위된 대통령” 걱정을 했다. 자신들을 위해 봉사해야 할 권력이 땡볕에 줄 세우는 것은 당연시하면서도 힘을 가진 권력의 미래를 걱정하는 맹목적인 시민들의 모습이 어딘지 불안하게 느껴졌다면 지나친 기우일까.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
#미국 대선#도널드 트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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