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과 하루 만에 만들어 낸 역사적 이벤트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은 6·25 정전협정 체결 이래 66년간 분단과 대결의 상징이었던 비무장지대(DMZ) 내 판문점에서 만나 손을 맞잡았다. 슈퍼파워 미국 대통령의 예측불가 대담한 외교가 아니었다면 이런 깜짝 회동이 성사될 수 있었을까. 비록 더디지만 꾸준히 흘러온 한반도 평화의 저류(底流)가 만들어 낸 결과라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은 어제 오후 판문점 군사분계선(MDL) 위에서 만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땅을 밟은 최초의 현직 미국 대통령이 됐다. MDL을 넘어 북쪽으로 20걸음 걸어가 기념 촬영을 한 뒤 다시 김정은과 나란히 남쪽으로 건너와 자유의 집에서 한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눴다. 2·28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4개월 만이다. 북-미 정상 간 대화를 전후로 문 대통령이 합류하면서 남북미 정상의 3자 회동도 이뤄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이 역사적 순간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다”며 “지금껏 우리가 발전시킨 관계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정은은 “우리가 훌륭한 관계가 아니라면 하루 만에 이런 상봉이 전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이런 훌륭한 관계가 난관과 장애를 극복하는 신비로운 힘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번 전격 회동은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을 앞두고 진작부터 깜짝 성사 가능성이 제기됐지만 누구나 ‘설마…’ 했던 이벤트다. 트럼프 대통령의 DMZ 방문은 재작년 11월 방한 때 기상 문제로 불발된 것이었고 북-미 정상이 최근 ‘흥미로운 내용’이 담긴 친서를 주고받으며 물밑에서 모종의 이벤트도 논의됐을 테지만, 그 시도는 트럼프 대통령의 즉흥적 제안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불쑥 트위터에 올렸고 김정은이 한달음에 달려오면서 전격 성사됐다고 한다.
회동의 성사는 북-미 양측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내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외교적 성과에 목말라 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 문제의 진전을 보여주는 상징적 이벤트가 필요했고, 김정은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북 이후 새로운 국면 전환의 계기를 노리던 상황에서 ‘톱다운’식 정상 담판의 부활을 과시하는 이벤트가 필요했다. 그 만남은 제대로 준비 안 된 즉석 회동이었지만, 굴곡 많은 비핵화 여정에선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화려한 이벤트가 곧바로 문제의 실질적 진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화려한 쇼가 끝난 뒤엔 고단한 실무협상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 회동으로 북-미는 하노이 결렬 이래 4개월 넘게 멈춰 서 있는 대화를 복원시켰다. 하지만 꺼져 가던 대화의 동력을 살려낸 것 외에 크게 변한 것은 없어 보인다. 김정은은 여전히 미국에 ‘셈법 수정’을 요구했을 테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제재는 유지될 것”이라며 ‘선(先)비핵화’ 기조를 재확인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으로 2∼3주 안에 북한과의 실무협상이 시작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북한은 강경파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협상 배제를 주장하며 새로운 미국 측 협상 라인 구축을 기대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폼페이오 장관과 스티븐 비건 대북정책특별대표로 이어지는 기존 협상라인을 유지한다는 방침을 고수했다. 정상 간엔 아무리 좋은 관계일지라도 실질적 협상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의 워싱턴 방문도 요청했다. 하지만 그것은 실무협상을 통해 북한의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를 분명히 명시한 일괄타결과 신속한 이행 로드맵이 완성된 뒤 두 정상이 만나 서명하는 이벤트로 제시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서두를 필요 없다. 속도보다는 올바른 협상을 추구하겠다”고 했다. 내년 대선 일정을 감안하면 북-미 간 포괄적 합의와 북한의 비핵화 이행을 서둘러야 하지만 나쁜 거래는 하지 않겠다고 거듭 다짐한 셈이다.
판문점 회동은 남북 대화에도 일단 청신호를 보냈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위대한 변화를 만드는 주인공’이라고 헌사하며 이번 회동에서 북-미 두 정상에게 주역의 자리를 내주고 기꺼이 조연을 자처했다. 그러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을 사이에 두고 김정은과 대화를 이어가며 돈독한 관계를 과시했다. 그간 남측을 향해 “참견하지 말라”던 북한의 태도가 어떻게 바뀔지 주목되지만 북-미 관계와 남북 관계의 병행 진전을 기대해볼 만하다.
이번 판문점 남북미 회동이 한반도 교착의 돌파구를 여는 실질적 계기가 될지, 아니면 시간을 벌고 상황을 관리하기 위한 현란한 쇼로 판명 날지는 두고 봐야 한다. 그것은 머지않아 재개될 비핵화 실무협상에 임하는 북한의 자세 변화에 달렸다. 김정은이 한미 정상, 나아가 국제사회에 새로운 기대를 줬지만 이번에도 완전한 비핵화를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는다면 이번 회동은 막간의 요란했던 이벤트에 그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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