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서울 중구 남대문로 단암빌딩. 무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한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선거 캠프 발대식에서 갑자기 책상 위로 올라가자 주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회창은 노타이에 점퍼를 입은 채 “이제부터 나를 총재라고 부르지 마라. 자, 발로 뛰자, 아래에서 위로, 창을 열자”라고 외쳤다. 다들 처음 보는 이회창의 모습이었다. 한 측근은 “대법관 출신의 ‘대쪽 총리’를 자신의 브랜드로 내세웠지만 정작 많은 유권자들은 그를 귀족 엘리트라는 부정적 이미지로 봤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고 변하는 데 10년 걸렸다”며 “좀 더 일찍 깨달았으면 벌써 대통령이 됐을 텐데”라며 씁쓸해했다. 그는 두 달 후 15.07%의 득표율로 비교적 선전했지만 대통령의 꿈을 이루기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종종 정치의 세계에선 자신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보다 밖에서 어떻게 인식되는지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자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믿는데, 주변에서 나쁜 사람이라고 인식하면 정말로 그렇게 규정될 수 있다는 얘기다. 억울할 수도 있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래서 ‘정치 IQ’가 좋은 정치인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필요하면 실제와의 차이를 줄이려고 한다.
이회창의 ‘뒤늦은 깨달음’이 떠오른 것은 요즘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에서 벌어지는 풍경 때문이다. 과연 한국당은 자신들의 원조 격인 이회창이 대선을 두 번이나 날려 버린 뒤 깨달은, 이 비싸고 뼈저린 교훈을 알고 있을까. 아직 아니라고 본다.
대표적인 게 최근 여성 당원 행사의 ‘엉덩이 춤’ 논란이다. 한국당은 여성 비하 의도가 없었다고 하지만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이를 여성 비하라고 인식하고 있다. 사실 여부를 가리기 위해 별도 수사를 하지 않는 한 정치의 세계에선 여성 비하로 굳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당은 이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성 인지 감수성 제고 대책을 내놓기보단 남 탓을 한다. 황교안 대표는 지난달 27일 “좋은 메시지를 내놓으면 하나도 보도가 안 된다. 실수하면 크게 보도가 된다”고 했다.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렇게 말해 봤자 “한국당이 여성 비하 해놓고 대표는 언론 탓을 한다”는 인식을 더 굳힐 뿐이다.
강효상 의원의 한미 정상회담 통화 유출 파문에 대한 대응도 비슷하다. 나경원 원내대표는 “청와대가 강 의원의 폭로 내용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니 이제는 (그 폭로 내용이) 기밀이라고 한다.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강변했다. 하지만 일부 보수 인사도 이 말을 듣고 “나경원 말이 이해가 안 된다. 어쨌든 유출한 것 아니냐”고들 한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에 비판적인 천영우 전 대통령외교안보수석비서관이 “사실상 간첩 행위를 한 것 아니냐”고 지적할 정도다. 한국당과 강 의원은 “청와대가 해명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럴수록 “한국당이 외교 기밀을 유출했다”는 인식은 갈수록 사실로 굳어진다.
한국당 사람들은 이같이 일이 불거질 때마다 프레임을 거론한다. “집권세력이 자신들에게 ‘보수 꼴통’이라는 프레임을 씌우려 한다”는 것이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프레임 씌우기는 누구나 하는 정치 행위. 한국당도 여권을 상대로 소득주도성장 폐해를 거론하며 ‘경제 실정 프레임’을 내세우고 있다.
한국당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요즘 자신들이 유권자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 에누리 없이 리뷰해 봐야 한다. 그러지 않고 여권의 프레임 공격만 원망하고 남 탓 해봤자 많은 사람들은 ‘변화를 거부하면서 피해자 코스프레 하고 있다’고 여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총선 결과는 보나 마나이고, 우리 정치 지형은 더 기울어진 운동장이 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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