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산고 한 학년이 360명인데 재수생 포함해 275명이 의대로 간다.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지난달 26일 국회 교육위원회에 출석한 김승환 전북도교육감의 발언을 듣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상산고가 입시교육만 한다는 근거로 의대 진학률을 들었는데 우선 사실이 아니다. 올해 상산고 졸업생 386명 중 48명(12%)이 의대에 진학했고, 재수·삼수생(71명)을 포함해도 119명이다. 치대·한의대 진학생을 포함해도 김 교육감이 말한 숫자보다 97명이나 적다. 그리고 설령 사실이라 한들 의대에 많이 보내면 ‘나쁜 학교’란 말인가.
우리 사회에서 의사는 부와 명예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직업이다. 외환위기 이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부모 세대를 보고 자란 자식 세대는 안정을 추구하게 됐고, 이런 선택의 집합이 의대 열풍이다. 사회 기저의 흐름을 외면한 채 고교 한 곳에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니다. 10년 전 홍성대 상산학원 이사장은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상산고를 설립한 목적은 우리나라에서도 퀴리 부인이나 아인슈타인 같은 훌륭한 과학자를 길러내고 싶었던 것이지 의사들만 잔뜩 양산해 내려던 게 아니다”라며 의대 열풍을 걱정했다. 두 달 전 인터뷰에선 “의대를 안 보내려고 발버둥치는데 꾸역꾸역 간다”고 했다.
김 교육감의 논리대로라면 의대 진학률이 높은 과학고, 영재학교도 문을 닫아야 한다. 의대 재수를 선택하는 이공계 재학생이 속출하는 서울대나 KAIST도 없어져야 한다. 나랏돈으로 세운 곳은 의대를 많이 보내도 괜찮고 사학은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자율형사립고를 폐지하면 오히려 강남 8학군이 부활할 것이란 우려가 나오지만 이에 대한 대책도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정부의 자사고 폐지 공약이 이념적인 구호일 뿐 실질적인 정책이라고 볼 수 없는 이유다.
‘평등 교육’을 내세운 북한에서도 우리와 이름만 다를 뿐 과학고 외국어고 예술고가 존재한다. 최근 만난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탈북 교수는 “3대가 정권을 세습하는 동안 재능이 뛰어난 학생을 조기 발굴해 수재교육을 한다는 방침은 변한 적이 없다”며 “인적 자원 없이는 체제 유지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1958년 개교한 평양외국어학원은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 등 엘리트 외교관을 배출했다. 태 전 공사는 ‘3층 서기실의 암호’에서 “어머니가 ‘간부 집 아이들은 다 외국어학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권해 응시했다”고 썼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부인 리설주가 졸업한 금성학원은 예술영재교육기관이다. 평양제1중학교는 우리 과학고에 해당한다. 출신성분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이들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과외가 성행할 정도라고 한다.
키 작은 아이는 까치발을 서고, 키 큰 아이는 무릎을 굽혀 키를 맞춰 서는 것이 평등 교육은 아닐 터다. 키 큰 아이든, 작은 아이든 생긴 대로 재능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지면 된다. 수월성 교육과 평준화 교육에 금을 ‘쫘악’ 그어 놓고 배척해선 인재를 키울 수 없다. 다르게 생긴 학교는 단 한 곳도 용납할 수 없다는 발상, 그래서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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