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4월 4일 이승만 대통령이 현순 목사에 보낸 설립 승인 전보
美 USC 동아시아도서관서 발견… ‘현순 독단 설립’ 기존 관점 뒤집어
“This will officially confirm your appointment as minister plenipotentiary to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and will approve establishment of legation. Syngman Rhee. President of the Republic of Korea.(이것은 당신을 주미 전권공사로 임명함과, 그리고 공사관 설립에 동의함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당하고 대한제국 주미공사관이 폐쇄된 지 16년 만인 1921년. 그해 4월 4일 이승만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이 미국에 주미공사관을 설립하라고 당시 구미위원장 대리였던 현순 목사(1880∼1968)에게 보낸 공문 전보가 처음으로 발견됐다.
김도형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은 “미국 남가주대(USC) 동아시아도서관이 소장한 이 전보를 최근 확인했다”며 “현순이 이승만이나 임정의 승인을 받지 않고 독단으로 주미공사관을 설립했다고 본 기존 관점을 뒤집는 자료”라고 1일 밝혔다. 이 전보는 이승만의 전보 문서를 모은 기존 자료집이나 미국 교포에게 임정 소식을 전하던 신한민보 등에도 실리지 않았다.
대한민국 수립 전 주미공사관이라고 하면 보통 지난해 복원한 대한제국공사관을 떠올린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시 아주 잠깐이지만 주미공사관을 운영했다. 현순은 이승만의 설립 승인 전보를 근거로 그해 4월 14일 워싱턴 매사추세츠 애비뉴 1325번지에 주미공사관을 설치했다. 이튿날인 15일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신한민보사에 설치 사실을 알렸으나 보도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는 이승만이 현순의 공사관 설립 계획을 승인하는 듯한 전보와 이후 이를 취소하는 전보만 확인됐다. 이 때문에 기존 연구에선 공사관 설립은 현 목사의 구미위원장 해임으로 이어진 해프닝 정도로만 이해했다. 이승만은 설립을 승인한 지 사흘 만인 4월 7일 “(임정) 국무원이 불찬(不贊)이요”라며 공사관을 설립하지 말라는 전보를 현순에게 보냈다. 그러나 현순이 공사관 설립을 강행하자 다시 “허락 없이 왜 했소”(4월 17일), “당신의 (구미위원부) 위원 해임. 공사 위임 취소”(4월 19일)라고 보냈다. 이승만은 현순 대신 서재필(1864∼1951)을 임시 구미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김 연구위원은 “이승만도 주미공사관을 운영하고 싶었기에 일단 설립을 승인했지만, 일본 정부가 이를 문제 삼아 미국 정부에 항의하면 구미위원부까지 없어질 수 있다는 서재필 등의 반대 의견을 따랐다”고 설명했다. 서재필이 운영하던 필라델피아 통신부와 영국 런던사무소를 폐지해 공사관 운영비를 충당한다는 현순의 계획도 부담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현순은 이승만의 지시에 따르지 않았고, 1921년 5월 6일 미 국무부를 방문해 한미 국교 회복을 요청했다. 11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미대표’라는 직함으로 미 정부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외교·통상 관계를 즉시 재개해 달라는 요청을 서면으로 제출하기도 했다. 현순은 워런 하딩 미 대통령(재임 1921∼1923년) 취임 뒤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공사관 설립을 서둘렀다.
김 연구위원은 4∼6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에서 열리는 국제정치학회 학술대회에서 ‘현순의 주미공사관 설치 관련 자료 검토’라는 제목으로 이 연구를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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