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책이 팀장이고 직급이 차장이면 ‘김 팀장’으로, 실장이자 상무인 사람은 ‘김 상무’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고….”
미국에서 20여 년을 일하다 한국 기업에 온 A 부사장은 호칭이 어려웠다. 한국에선 직책과 직급 중 높은 것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다행히 이 회사가 ‘님’ 호칭으로 바꾸면서 한시름 놨다.
요즘 기업들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가 수평적 조직문화 만들기다. 이미 ‘님’, ‘프로’, ‘영어 이름’ 등 호칭 파괴는 2000년 CJ그룹을 시작으로 아모레퍼시픽, 네이버, 카카오, SK텔레콤, 삼성전자, 삼성생명 등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정답’이 없는 불확실한 패러다임 전환 시기에는 소통을 통한 혁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상사한테 “B 프로젝트 검토해 봤더니 진짜 이건 아니다” 같은 피드백을 빨리 전해야지 괜히 혼날까 미적거리는 것은 회사로선 손해다. 또 젊은 세대 인재를 끌어오려면 실리콘밸리식 수평적 조직문화가 필수다. 그래서 ‘님’으로 부르고, 넥타이도 풀고, 직급 체계도 줄여보고, 심지어 퇴근할 때 상사한테 인사 안 하기 캠페인을 벌이는 곳도 있다. 서로 반말을 쓰는 스타트업도 나타났다. 정말 별의별 실험이 진행 중이다.
수평적 조직문화를 위해 이런 실험을 하는 것은 사실 그만큼 수직적 문화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의미도 된다. 우리는 언어에서조차 위계 문화가 배어 있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한국어만큼 존댓말 체계가 복잡한 언어는 인도네시아 자바어 정도라고 한다.
또 영어의 ‘Mr, Ms’나 일본어의 ‘…상’처럼 이름에 붙이면 되는 존칭이 보편적이지 않고, 주로 직업이나 직책을 알아야 상대를 부를 수 있어 모르면 말 걸기가 쉽지 않다. 은퇴한 분께 연락할 때에는 그의 모든 경력 중 가장 높은 직책이 무엇인지 찾느라 주변에 물어봤던 기억도 난다.
게다가 ‘친구’의 조건도 엄청나게 까다롭다. 꼭 같은 해에 태어나야 한다. 빠른 연생 제도가 있던 시절, 같은 해 1, 2월에 태어난 사람은 친구에서 빠진다. 각종 모임에서도 나이를 알아야 잡일하는 ‘막내’, 밥값 많이 낼 ‘큰형님’의 역할을 줄 수 있다.
나이와 회사에 입사한 연도는 기업 인사에 있어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국내 패션업계 관계자는 “창의성이 중요한 패션업계에서조차 대기업은 수석 디자이너로 20대를 뽑긴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해외에선 나이, 연차 묻지 마 식 파격 인사 사례가 적지 않다. 니콜라 제스키에르 현 루이비통 수석디자이너가 1997년 발렌시아가의 부활을 이끌었을 당시 나이가 26세였다.
우리 사회 문화 자체가 위계를 중시하니 한국 조직문화엔 답이 없는 걸까. 리더의 의지만 있다면 그렇진 않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실제로 별의별 실험을 하다 보니 “회식은 꿈도 못 꾸고 휴가를 반려했다가 오히려 경고 먹는 문화로 천지가 개벽했다”는 임원들의 하소연(?)도 난무한다. 수평적 조직문화의 종착역은 결국 능력주의다. 그러니 나이가 한참 어린 (오너가가 아닌) 상사가 흔한 일이 되는 시대가 순식간에 찾아올 수 있다. 지금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놓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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