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1월 문재인 대통령은 아세안과 한국의 관계를 한반도 주변 4강(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신(新)남방정책’을 발표했다. 지난해 8월 대통령 직속으로 ‘신남방정책 특별위원회’를 설치한 데 이어 올해 5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대표부를 신설했다. 신북방정책과 더불어 핵심 외교정책의 한 축인 셈이다.
그런데 신남방정책의 최전방 기지인 베트남과 말레이시아에서 탈이 났다. 외교부와 삼성에서 근무했던 김도현 주베트남 대사와 산업통상자원부 출신인 도경환 주말레이시아 대사가 비위에 연루돼 두 달 전 소환됐다. 김 대사는 지난해 10월 현지 기업으로부터 항공권과 숙소를 제공받은 사실이 인정돼 청탁금지법 위반 등으로 최근 해임됐다. 도 대사는 직원에게 폭언을 하고 식자재 구입비를 부풀려 공금을 횡령했다는 의혹으로 인사혁신처 중앙징계위에 회부됐고 징계위의 결정 통보를 기다리고 있다. 아세안 10개국 중 특임대사가 부임했던 2개국 모두 대사가 연루된 ‘대형 사건’이 터진 것이다.
‘新남방정책’ 특임대사 2명 좌초
○ “재외공관이 일을 너무 안 한다”
노무현 정부 당시 자주파로 분류돼 동맹파와의 갈등의 중심에 있던 김 전 대사는 지난해 4월 특임대사로 부임했다. 처음에는 코드 인사 논란 속에 불거진 사건이려니 했는데 그가 소환된 이후 베트남 일부 교민 사이에서 그의 구명 운동이 벌어졌다.
사유가 있다면 징계를 받아야 마땅하겠지만 그 속사정이 궁금해졌다. 중앙징계위가 열리기 직전인 5월 16일 김 전 대사를 만났다. 지난주 소청심사까지 마무리됐기에 그의 주장 중 ‘재외공관의 문제점’에 대한 대목들을 지면에 싣는다.
―직원에게 폭언을 하는 등 이른바 ‘갑질’ 의혹이 있다.
“다른 부처에서 파견된 주재관들과 갈등이 컸다. 양국 간 외교는 늘 하던 일이다. 현지 기업의 애로를 해소하고, 교민들의 교육이나 비자 문제 등을 다루려면 이들이 움직여야 한다. ‘3년 쉬러 왔는데 왜 일이 많아지지’라는 불만이 있었다. 재외공관에 파견 나오면 일을 하나, 안 하나 평가는 똑같다는 거다. 사실 인사고과에 영향이 없는 게 맞다. 기업에서 온 입장에서는 ‘이렇게 일을 안 할 수가 있나’ 싶었다. (※그는 2013년부터 삼성전자에서 5년간 근무했다) 일이 진척되지 않다 보니 화를 낸 것도 사실이다.
―부정청탁금지법 위반으로 중징계를 받았는데….
“지난해 2월 다낭, 10월 냐짱 출장에서 베트남 기업으로부터 항공권과 숙박을 지원받은 게 문제가 됐다. 냐짱 출장의 경우 KN골프클럽 개관식이었는데 가족 동반으로 참석했다. KN그룹 부회장이 딸만 넷이다. 우리 아이들이 다섯인 걸 알고 반가워하며 초청했다. 공무상 출장으로 결재받은 사안이다.”(※그의 해명은 징계위서 수용되지 않았다.)
“주재관들 ‘일 많아졌다’며 반발”
―정상적인 외교 활동이라면 왜 직원들이 반발했나.
“신남방정책 추진이라는 특명을 받고 임명됐다. 관행대로만 일한다면 특임대사가 왜 필요한가. 그런데 이런 관행을 바꾸려면 저항이 따른다. 외교관이든 주재관이든 열심히 일해 특임대사에게 인정받아도 인사상 이익이 별로 없다. 아주 유력한 정치인이 온다면 모를까 조직 장악이 어렵다. 요즘 아래 직원들이 ‘화난 말투였다’ ‘눈빛이 쏘아봤다’며 갑질이라고 하면 움츠러든다. 민간기업과 공무원 문화가 다른데 빨리 적응을 못 한 것은 잘못이라 생각한다.”
○ “교민들 만나면 골치 아프니 만나지 말라고 해”
김 전 대사가 다른 부처 출신 주재관들에 대해 할 말이 많은 반면 산자부 출신인 도 대사는 외교부 직원 4, 5명의 집단적인 저항에 부딪혔다고 주장한다. 지난달 27일 도 대사와 통화를 했다.
―외교부 출신들과 불화가 있었다는 건가.
“신남방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가자마자 신남방정책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한류 열풍을 경제와 연계하고, 할랄푸드 시장에 진출하는 로드맵을 만들어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외교부 출신들이 ‘안 된다’며 지시 거부를 하더라. 대사관 예산 결재 권한을 외교부 출신인 차석 대사한테 위임해 달라는 요구가 있었다. 이를 거부했더니 갈등이 점점 커졌다. 인사권이 없으니 이런 상황을 통제하기 어려웠다.” ―재외공관이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처음 부임해서 직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교민들을 만나면 골치 아프니 만나지 말라’는 것이다. 해외공관이야말로 공무원 복지부동의 전형이다. 주거비 학비 통신비 등 각종 수당이 포함돼 본부보다 3, 4배 급여를 많이 받는다. 그에 상응하는 일을 하기보다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있다.”
○ “적지에서 집안싸움으로 자멸한다”
두 대사의 해명은 자신들의 부적절한 처신을 변명하기 위해 조직에 책임을 돌리는 것일 수 있다. 또는 그들의 주장처럼 나태한 조직을 바꿔보려다 반감을 산 상태에서 허물을 잡힌 것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진위는 차차 드러나겠지만 두 대사의 해명에는 공통점이 있다. ‘고립된 왕국’인 재외공관에서 외교관과 주재관 사이 해묵은 갈등이 우리 외교 역량을 해치고 있다는 점이다.
전·현직 외교관, 주재관과 통화해 보니 “외교관과 주재관이 그저 한 공간에 머물 뿐, 전혀 시너지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각 부처에서 파견한 주재관들은 ‘쉬러 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기수나 승진 순서대로 파견을 나오니 긴장감 없이 업무에 임한다. 반면 외교관들은 권위적인 관행, 폐쇄적인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외교관은 주재관을 향해 “남 일 보듯 일한다”고 하고, 주재관은 외교부 출신을 향해 “자기들끼리만 뭉쳐 다닌다”고 하며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다고 한다. “국익을 수호하는 최전방이 재외공관인데 집안싸움으로 원팀 대응이 어렵다”고도 했다.
외교관-주재관, 편갈라 집안싸움
현재 재외공관 수는 166곳이다. 공관당 인원은 수 명에서 수십 명까지 편차가 크지만 3, 4인 공관이 35%를 차지한다. 실질적인 외교력을 발휘하기에는 규모가 작아 통폐합의 필요성도 제기된다. 대사 자리를 위해 공관을 늘리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상황이다. 외무고시 출신이면 정년까지 공관장 두 번은 나간다는 암묵적인 공식이 아직도 통한다. 공관장이 굳이 성과를 내거나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다. 더욱이 미국 중국같이 대형 공관들은 업무량도 많고 각종 감사도 정기적으로 받지만 이런 소형 공관들은 감시 사각지대에 있다.
주재관은 각 부처에서 인사를 한다. 그러다 보니 공관장에 대한 충성도가 낮고 외교 업무의 전문성도 부족한 경우가 없지 않다. 공관장은 인사권이 없는 대신 이들에 대한 지휘 책임 역시 지지 않는다. 기강 해이를 막을 제도적 장치는 없는 것이다.
특임공관장 자질 검증 강화해야
외교관 출신이 아닌 공직자 학자 정치인 등 전문가를 선발하는 특임대사는 더욱 고립되기 쉽다. 이번에 특임대사 공관만 사고가 난 것을 두고 “순혈주의를 깨려다 자질과 조직 관리 능력이 제대로 검증이 안 된 상태에서 공관장을 내보낸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정부는 현재 19%인 특임대사 비율을 30%까지 늘리겠다고 했지만 공관장만 바꿔서는 ‘무사안일’ 외교 관행을 깨기가 어렵다.
“이런 일이 터질 때마다 외교관과 주재관 사이 불신의 벽은 더 높아집니다. 이들 사이 화학작용이 일어나도록 재외공관 개혁이 필요합니다. 적지에서 우리끼리 자멸해서야 되겠어요.” 전직 외교부 출신의 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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