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부진속 6개월째 0%대 물가
정부 “관리물가 하락-아마존효과 탓”… 전문가 “소비감소 등 수요위축 영향”
민간선 ‘준디플레 상황’ 경고 등장… 소비자와 괴리 ‘통계착시’ 의견도
정부 ‘디플레 가능성’ 일축 불구… 경기침체에 대외여건도 악화
日경제보복조치 악재까지 돌출… 일본식 디플레 불씨 꺼지지않아
“콩국수가 1만2000원, 냉면이 1만4000원인데 저(低)물가라고요?”
직장인 김모 씨(42)는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0%대라는 통계청의 발표가 잘 납득이 가질 않는다. 여름이면 즐겨 찾던 유명 맛집의 콩국수 한 그릇이 1만2000원, 직장 근처 식당의 냉면 메뉴가 1만4000원이다. 마치 자기 월급 빼고는 세상 모든 것이 다 오른 것 같은 느낌이다.
음식점 메뉴판만 보면 국내 물가가 엄청나게 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 경제는 실제 지표상으로는 물가가 너무 낮아 걱정인 상황이다. 외식 등 ‘장바구니 물가’는 높을지 몰라도 각종 물품과 주거비, 통신비 등을 반영한 전반적인 물가상승률이 1%를 밑돌며 이상신호를 보이고 있다.
‘물가 당국’인 한국은행도 올해 물가상승률이 0%대에 그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이주열 한은 총재가 최근 “중앙은행이 과거에 비해 물가 움직임에 대응하기 어려워지는 난관에 직면해 있다”며 저물가를 타개할 뚜렷한 해법이 없음을 토로했을 정도다. 과거 중앙은행들의 목표가 지나친 인플레이션을 막는 ‘물가 안정’에 있었는데, 지금은 ‘물가를 어떻게 하면 올릴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니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따로 없다.
저성장과 저물가가 ‘뉴 노멀(New Normal)’이 되면서 이를 극복하는 것이 한국 경제에 새로운 도전과제가 되고 있다.
○ 한국 경제 덮친 ‘저물가 공포’
디플레이션(Deflation)은 물가가 일정 기간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현상을 말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물가상승률이 2년 이상 마이너스(―)를 보이는 경우를 디플레이션으로 정의한다. 이 같은 정의에 의하면 한국은 조금씩이나마 물가가 오르기 때문에 아직 디플레이션 상태라고 볼 순 없다.
하지만 이례적인 저물가 행진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시장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6월 소비자물가지수가 전년 동월 대비 0.7% 상승하는 데 그치는 등 6개월째 0%대 상승폭을 이어가고 있다. 이대로라면 연간 상승률도 1%를 밑돌 가능성이 크다. 물가상승률이 연간 기준으로 0%대에 머무른 건 외환위기 직후였던 1999년, 국제유가가 큰 폭으로 내렸던 2015년으로 두 번뿐이다. 국내 물가는 주요국과 비교해도 극히 낮은 수준이다. 올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소속 국가들의 평균 물가상승률은 2.1∼2.5% 수준이다.
일반적으로 물가가 낮은 게 높은 것보다는 당연히 좋은 것 아니냐는 생각도 많이 한다. 물론 물가상승률이 낮은 수준을 유지하면 같은 벌이라도 씀씀이에 여유가 생기니 좋은 점이 있다. 하지만 요즘처럼 경기가 안 좋은 상황에서 저물가가 장기간 이어지는 것은 경제에 ‘적신호’다. 저물가가 지속되면 소비자는 소비를 미래로 미루게 되고, 기업도 생산과 투자를 연기하며 고용을 줄인다. 자칫 ‘저물가→소비 감소 및 투자 위축→저물가 및 경기부진 지속’이라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 있다. 사람의 체온이 너무 높거나 낮으면 안 되는 것처럼, 물가도 너무 낮으면 위험하다. 경제 활력을 어느 정도 뒷받침할 수 있는 수준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 ‘구조적 문제냐, 통계 착시냐’…원인 놓고 해석 분분
저물가의 원인을 두고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맞서고 있다. 정부는 공급 쪽에서 비롯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본다. 채소류와 공공서비스, 집세 등 일부 품목의 가격 하락이 한시적으로 물가상승률을 끌어내렸다는 얘기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지난해 겨울과 올봄 날씨가 좋아서 농·축산물 가격이 안정된 데다 유류 가격도 하락해 낮은 물가가 형성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학 입학금의 단계적 폐지, 무상급식과 교복·교과서 무상지원 확대 등의 각종 정부 복지정책도 물가를 낮추는 데 기여했다.
최근 경제학자들은 저물가의 원인을 설명할 때 ‘아마존 효과’라는 말도 사용한다. 아마존 효과란 아마존과 같은 온라인 유통업체의 등장으로 유통 마진이 낮아지면서 물가가 정체되는 현상을 뜻한다. 오프라인보다 가격이 저렴한 온라인 소매판매 비중이 커지면서 전체 물가를 낮추는 데 영향을 줬다는 얘기다.
저물가가 통계상 착시에서 기인한다는 의견도 있다. 통계청은 생활에 밀접한 460개의 품목을 선정해 생활에 얼마나 밀접한지, 가구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에 따라 가중치를 달리 매긴다. 예컨대 주류·담배의 가중치가 15.8, 집세의 가중치가 93.7인 식이다. 하지만 가중치가 큰 품목과 소비자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품목에는 괴리가 있다. 가령 소비자들은 거의 매일 소비하는 담배 주류 외식 식료품 등의 가격 변동에 민감하지만 정작 가중치가 크게 매겨지는 전·월세 가격은 2년에 한 번 실감할 뿐이다.
심리적인 요인도 있다. 대중교통으로 출근하는 직장인은 교통비, 중·고등학생 자녀를 둔 부모는 교육비만 올라도 물가가 크게 오른다고 여긴다. 또 소비자들은 보통 가격 하락에는 둔감하지만 가격 상승에는 민감하다. 요즘 같은 경기침체기에는 같은 물가상승이라도 더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 디플레 전조 우려도 높아져
하지만 상당수 전문가들은 위 요인만으로 6개월 연속 0%대 물가상승이라는 이례적 현상을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말한다. 정부의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는 소비 위축, 투자 감소 등으로 경제 전반의 수요가 위축된 영향이 더 크다는 것이다. 실제로 공급 변수를 제거하고 수요 측면을 볼 수 있는 근원물가 상승률은 0%대에 머무르고 있다. 소비심리도 나쁜 상황이다. 한은의 소비자심리지수는 5월과 6월 2개월 연속 하락하며 100을 밑돌았다. 김소영 서울대 교수는 “최근의 저물가 배경에는 경기부진으로 인해 수요가 줄어든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라며 “물가가 낮다고 좋아할 때가 아니라 중앙은행과 정부가 상황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민간에서는 이미 우리 경제가 ‘준(準)디플레이션’ 상황에 처했다는 경고도 나온다. 현대경제연구원이 5월 보고서에서 이 용어를 사용했다.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로 꺾이고 소비와 투자, 고용이 모두 부진한 것이 물가하락 압력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디플레이션은 인플레이션보다 훨씬 무서운 현상이다. 경기침체로 주머니가 얇아진 소비자가 지갑을 닫아 물가가 떨어지면 물건을 팔아서 돈을 버는 기업의 매출과 이익은 더욱 줄어든다. 이는 다시 실업률 증가와 소비 감소로 이어진다. 한번 시작되면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이어지는 ‘디플레이션 악순환(Deflation Spiral)’에 빠지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일본의 장기불황을 가져온 것도 바로 디플레이션이었다. 일본 증시와 부동산 시장의 거품이 붕괴하고 자산가격이 떨어지면서 개인은 소비를 줄였고, 기업은 줄줄이 도산했다. 일본 정부가 각종 정책을 쏟아냈지만 백약이 무효였다. 결국 장장 20년에 걸친 불황이 이어졌다. 이런 무서운 디플레이션이 현실화되기 전에 한은이 빨리 금리 인하로 대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 너무 방심하다 괴물에 잡힐 수도…
그러나 정부는 디플레이션 가능성이 사실상 없다고 일축하고 있다. 최근 저물가는 일부 품목에서 나타난 가격 하락에 따른 것으로 전방위적인 가격 하락으로 번지는 일반적인 디플레이션과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최근의 저물가 현상이 경기침체를 동반하고 있어 가계 기업 등 경제 주체의 심리가 언제든 더 크게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대외 여건도 좋지 않다. 미중 무역분쟁이 아직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가 나오는 등 악재가 돌출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미래를 더 불안하게 만들고 소비자들은 더 지갑을 닫고, 허리띠를 졸라맬 수밖에 없다. 디플레이션은 절대 없으리라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몇 해 전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디플레이션은 단호히 맞서 싸워야 할 괴물(ogre)”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에까지 디플레이션을 비유한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번 이 괴물에 잡히면 가까운 일본의 사례에서 보듯 어떤 대책을 동원해도 벗어나기 힘들다. 공포와 두려움도 문제지만, 지나친 낙관론도 독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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