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나’는 ‘회사, 알바, 나’의 약칭인 동아일보 출판국 컨버전스 뉴스랩(News-Lab)으로, 소속 기자는 모두 밀레니얼 세대다. <편집자 주>
386 언저리 세대를 다룬 홍상수 감독의 영화 ‘생활의 발견’은 두고두고 회자될 대사를 남겼다. “우리가 인간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 조국(54)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관한 의혹이 이 대사를 호출한다.
그는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 시절이던 5월 18일 페이스북에 ‘5·18 폄훼 망발을 일삼는 자들 (중략) 사람 되기는 힘들어도 괴물이 되진 말자’고 했다. 이튿날 바른미래당 김정화 대변인은 조 수석에게 “사람 되기는 힘들어도 자신의 허물을 보지 못하는 괴물은 되지 말자”며 말을 되돌려줬다.
“괴물이 되지 말자”는 집합적 무의식
조국 일가에 관한 의혹이 나라를 덮기 시작한 8월 17일 이호선 국민대 법학과 교수는 “조국에게 솔직히 묻는다. 당신이 괴물 아닌가. 당신이 황철웅, 오 포교가 아닌가”라고 공개 질의한다. ‘권력의 살수(殺手)가 돼서라도 승자의 반열에 오르려는 황철웅, 어쭙잖은 완장을 차고서 윗사람에게 아부를 행하고 아랫사람에게는 몽둥이를 휘두르는 오 포교(捕校)’라는 조국의 과거 글을 패러디한 셈이다.
‘괴물은 되지 말자’라는 말은 386세대의 망탈리테(mentalite·집합적 무의식의 총체)를 드러낸다.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저서 ‘마음의 사회학’을 통해 이 대사의 감수성이 ‘386세대적’이라고 평하면서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다시는 그런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다소 우울하게 냉소하고 있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조 후보자를 둘러싼 의혹은 20대와 386세대 간 갈등의 전초전으로 번질 모양새다. 20대의 상당수는 조 후보자 딸의 ‘논문 제1저자 허위 등재 및 고려대 부정 입학’ 의혹, 장학금 특혜 의혹에 실망해 조 후보자의 사퇴를 요구했다. 반면 조 후보자와 비슷한 연배인 진보 진영의 주류는 ‘조국 사수’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20대와 386세대 사이에 다양한 담론 전쟁이 전개되고 있다.
청년을 겨냥한 YTN 앵커의 ‘반듯한 아버지’ 발언은 20대를 보는 386세대의 시각을 오롯이 응축했다. 한 청년이 8월 24일 자유한국당 주최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나는 조국 같은 아버지가 없다. 그래서 용이 되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한 것에 대해 변상욱(60) YTN 앵커는 ‘반듯한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면 수꼴(수구꼴통) 마이크를 잡게 되진 않았을 수도. 이래저래 짠하다’고 했다.
1984년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변 앵커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고문은 사라져야 한다’는 방송 리포트를 내보내 명성을 얻었다. CBS 보도국장과 부산CBS 본부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CBS에서 정년퇴직한 후 YTN에서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몇몇 386세대 인사는 “자유한국당 집회나 태극기 집회에 나서는 20대는 수꼴에 기웃거리는 미완의 인격체”라고 말하기도 한다.
386세대인 공지영(56) 작가는 5월 21일 트위터에 ‘나는 조국을 지지한다’ ‘온갖 적폐의 원조인 자한당이 마치 정의의 이름인 척 단죄하려 든다’고 썼다. 역시 386세대인 안도현(58) 시인은 5월 19일 트위터에 ‘물어뜯기는 조국보다 물어뜯으려고 덤비는 승냥이들이 더 안쓰럽다’고 썼다. 친여 386세대 문인들 사이에서 ‘괴물’ 혹은 ‘승냥이’는 야당과 ‘일부 언론’이다.
서울대생 집회에 “물 반, 고기 반”
이들에 앞서 김의겸이 있었다. 386 학생운동권 세대인 김의겸(56) 전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해 12월 김태우 전 특별감찰반원의 민간인 사찰 의혹 폭로로 논란이 불거지자 “문재인 정부의 유전자에는 애초에 민간인 사찰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전 대변인이 보기에 ‘유전자부터 다른 괴물’은 ‘민간인 사찰을 한 보수 세력’일 것이다.
유시민(60)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8월 29일 TBS 라디오에 출연해 서울대생들의 촛불집회를 문제 삼았다. 그는 “집회가 사실상 물 반, 고기 반”이라며 “순수하게 집회에 참석한 학생이 많은지, 집회에 나온 사람들을 보러 온 자유한국당 관계자가 많은지 확인할 데이터가 없다”고 했다.
조 후보자를 반대하는 20대의 목소리에 대한 386세대 진보 주류의 이 같은 냉소와 조롱을 보며 20대를 대변하는 몇몇 인사는 재반박한다. 1982년생이자 경희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김병민 경희대 행정학과 겸임교수는 “진보 386세대가 꼰대가 됐다. 대의(大義)를 위해 ‘우리 편’의 작은 치부 정도는 전혀 문제될 게 없다는 심리”라면서 “상대가 괴물이니 우리가 이 정도의 괴물이 되는 건 당연하다는 논리다. 이것이 2030세대의 분노에 더 큰 불을 지폈다”고 꼬집었다.
변 앵커가 ‘수꼴’로 폄훼한 인물은 청년단체 ‘청사진’의 백경훈 공동대표다. 백 대표는 1987년생으로 전북대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그는 변 앵커의 발언을 전해 듣고 “화도 났고, 무엇보다 도덕적 우월감으로 가득 찬 한 세대의 민낯을 봤다”며 운을 뗐다.
“386세대가 ‘운동한 기간’은 3~4년인데, ‘운동한 이야기를 하는 기간’은 30~40년 같다. 민주화의 과실을 독차지하려 했듯, ‘국정농단 촛불집회’ 과실도 독차지하려 한다. 정답을 정해놓고 청년을 훈계한다. 자신들이 맞서 싸웠던 권위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북한을 대하는 태도도 그렇다. 386세대는 북한과 손잡고 ‘평화통일’로 가야 한다고 정답을 강요한다. 2030세대는 김정은이 미사일을 쏘면 따지기도 하고 ‘밀당’도 하면서 실용적으로 접근하자고 주장한다. 386세대는 이런 청년들의 생각도 ‘반(反)평화’라고 낙인찍는다.”
20대의 여론 흐름은 심상치 않다. 대학에서 20대를 가르치는 강보라 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의 설명이다.
“보수건, 진보건 20대가 그간 특정 진영을 더 신뢰해왔다고 보긴 어려울 듯하다. 하지만 20대 사이에서도 도덕에 대한 요구가 있었다. 부모 세대인 386세대 진보 명망가의 발언이나 책은 이를 일정하게 충족해주는 역할을 했다. 이번 사태로 그 신화가 파괴됐다고 보는 것 같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자본의 종류를 경제자본, 상징자본, 문화자본, 사회관계자본으로 나눈다. 한국식으로 보면 재산, 학벌, 고급 취향, 인맥이다. 자녀로의 계급 재생산은 이를 골고루 경유해 이뤄진다. ‘조국 일가’는 ‘황금의 축’을 넘치게 갖춘 특권 계급으로 비쳤다. 유시민 이사장은 이 같은 세간의 시선을 두고도 “조국만큼 모든 걸 가질 수 없었던 소위 명문대 출신이 많은 기자들이 분기탱천했다”고 비꼬았다.
“386, 아랫세대 성장 억압”
실상은 조 후보자뿐 아니라 386세대 전체의 권력 자원이 막강하다.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의 근작 ‘불평등의 세대’에는 ‘386 독점 체제’를 증명하는 적나라한 통계가 여럿 등장한다. 이 교수는 1998년부터 2017년까지 국내 100대 기업의 임원 총 연인원 9만3000여 명의 분포를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2000년대 초반 1960년대 출생 세대가 100대 기업 이사진에서 차지한 비율은 9%였다. 10년 뒤 이 비율은 60%로 치솟았다. 1960~64년 출생 세대는 2010년대 후반에도 100대 기업 이사진의 37%를 점유해 수위를 지키고 있다. 1965~69년 출생 세대의 비율도 35%에 달한다. 반면 벌써 40대 중후반에 다다른 1970~74년 세대가 임원진에 진입한 비율은 9.4%에 그친다.
여의도는 범 386의 독무대다. ‘불평등의 세대’에 따르면 2016년 총선에서 50대가 된 386세대는 524명의 입후보자를 내 역사상 가장 높은 입후보자 점유율(48%)을 기록했다. 반면 40대 당선인 비율은 17%로 역대 최하위다. 30대는 단 2명을 당선시키는 데 그쳤다.
세대 간 소득 불평등도 가시화됐다. 이 교수가 ‘통계청 가계동향조사 가구소득’을 통해 추산한 바에 따르면 386세대는 이미 1998년을 기점으로 전체 소득의 34%를 벌어 1950년대 출생 세대를 앞질렀고, 이후 17년 동안 수위를 지켰다. 시대적 운에 따라 가져가는 몫도 달랐다. 2007년에 44세였던 1963년생의 월 소득은 15년 전에 비해 71.7% 올랐다. 2016년 44세가 된 1972년생은 15년 전보다 21.3% 오른 월 소득을 벌었다.
이 교수는 ‘데이터를 합산하면 386세대는 근 20년에 걸쳐 국가와 시장의 수뇌부를 완벽하게 장악했고, 아랫세대의 성장을 억압했다. 정치권과 노동시장에서 최고위직을 장기독점하고 있다’고 썼다.
김정훈 CBS 기자, 심나리 전 CBS 기자, 정치인 김항기 씨가 쓴 책 ‘386 세대유감’에 의하면 386세대가 20대 후반일 때 평균 실업률은 3.5%였다. 반면 1980년대생의 20대 후반 평균 실업률은 9.2%이다. 1990년대생은 디스토피아 앞에 서 있다. 8월 14일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청년실업률은 9.8%까지 치솟았다. 1999년 7월 이후 20년 만에 최고치다.
386세대는 네트워크를 꾸리는 데도 발군의 실력을 갖췄다. 이때도 ‘민주화’가 소환된다. 1970년대 출생인 야당 소속 의원실의 한 보좌관은 “386세대를 엮고 있는 네트워크 중 하나가 각 대학 ‘민주동문회’다. 민주화 투쟁을 함께 했다는 자의식으로 총동문회와 자신들을 구별 짓는다”면서 “자신들이 학벌 네트워크에 기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부, 권력, 명예, 인맥 갖춘 386’이 20대 ‘훈계’
지금의 한국 사회는 부와 권력, 명예, 인적 네트워크를 두루 갖춘 386세대가 청년을 훈계하고 선동하며 때로는 손가락질하는 곳으로 비친다. 김의겸 전 대변인은 25억7000만 원짜리 상가주택을 10억 원의 은행 대출로 사들였다 구설에 오르자 청와대를 떠났다. 그러면서도 그는 청년세대인 언론계 후배 기자들에게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한 번만 의문을 달아주기 바란다”라며 마지막까지 훈계를 아끼지 않았다.
386세대는 자신들을 여전히 기득권에 맞서 싸우는 ‘투사’로 여긴다. 이 저변에 아웃사이더 콤플렉스가 똬리를 틀고 있다.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국외자로 규정짓는 셈이다. 유시민 이사장은 지금의 ‘반(反)조국’ 정서를 두고도 “누구든 조국처럼 기득권에 도전한 사람 중에 먼지 안 날 사람만 하라”고 말했다.
이런 386세대 ‘진보 꼰대’에 대해 ‘여전히 거악(巨嶽)의 핍박을 받고 있다는 과장된 피해의식, 자신의 모든 행위가 진정성의 발로라는 착각이 386세대의 감수성을 지배’ ‘저항, 고발 모드를 고수한 채 ‘싸가지 없는 말’을 유일한 무기로 삼아 일제 치하 독립운동가가 싸우듯 투쟁’(강준만의 ‘아웃사이더 콤플렉스’ 중에서)이라는 비평이 뒤따른다. 그러나 386세대 출신 진보 주류는 대체로 자신의 진정성을 몰라주는 청년세대를 두고는 “전 정부서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탓”을 문제 삼으며 “괴물이 되지 말자”고 말한다.
여권의 강도 높은 대응을 고려하면 이번 사태는 정치적 휘발성을 유지할 공산이 크다. 한편에서는 조 후보자에 대한 청년세대의 반감이 보수통합과 세대교체의 실마리로 작용할 수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김병민 교수는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이 모처럼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청년세대가 강한 불만을 표출함으로써 보수통합이 불붙을 가능성이 높아졌다”면서도 “다만 여야 공히 청년의 목소리를 담아낼 그릇을 못 갖춘 게 현실이다. 청년들의 호소에 호응할 수 있도록 세대교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세대교체 이전에 청년 정치인의 진화가 먼저라는 주장도 있다. 백경훈 대표는 “청년 정치인은 ‘민주화 세대 주니어’도 ‘산업화 세대 주니어’도 지양해야 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는 대안을 내놓기 위해 끊임없이 단련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일부 전문가는 청년세대 사이에 ‘반(反)정치주의’가 심화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강보라 연구원은 “20대는 세상이 기본적으로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고 판단한다. 어찌해도 안 바뀐다는 심리도 크고, 허무주의가 퍼져 있다”고 분석했다. 이어 “20대가 이번 사태 때문에 현실정치에 적극 개입하지는 않을 테고, 자유한국당에 표를 던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