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한마디로 ‘책이라는 종의 기원’이라 할 만하다. 책 이전의 책부터 “종이책의 시대는 끝났다”는 사망선고가 내려진 오늘날에도 이어지는 책의 변천을 담았다. 인간이 만든 저급한 종이가 인간다움을 만드는 최고의 발명품이 되기까지 진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파이낸셜 타임스’ ‘허핑턴 포스트’ 등에 기호학, 문장부호에 관한 글을 쓰던 저자는 책의 하드웨어에 집중했다. 종이는 활자, 인쇄, 출판, 제본 기술과 만나며 훌륭한 기록물로 거듭났다. 종이책은 “과학과 기술의 최전선이 빚어낸 산물”이 됐다.
책의 역사는 약 2000년으로 잡을 수 있다. 오늘날 책의 주재료인 종이가 만들어지기까지 고대 이집트 파피루스와 양피지를 거쳤다. 문자의 출현과 인쇄술의 발명으로 지식 생산의 토대가 구축됐다. 디자인·삽화 기술까지 가미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책의 외형적 이미지가 완성됐다.
갖춰진 외형에 영혼을 꽉꽉 채워 넣은 것도 인간의 몫이었다. 필경사, 수도사, 발명가, 인쇄 장인 등 ‘출판인’은 매번 수없는 고민 끝에 책을 만들고 변천을 이끌었다. 이 때문에 책의 역사를 훑어보는 건 곧 인간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책은 긴 시간 속에서 인간에게 많이 읽히기 위한 나름의 해답을 도출했다. 저자는 “책이 직사각형인 이유는 소, 염소, 양의 가죽이 직사각형이며 다루기 편한 적정 크기로 만든 이유는 오늘날 사람들이 이 크기의 책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서술했다.
스스로 책이라는 물건의 외형적 진화를 담고 있는 책인지라 책의 질감, 디자인도 특별하다. ‘애서가’라면 소장 욕심이 들 정도다. 표지에 판지를 그대로 노출했으며, 부제는 검정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했다. 마치 건물 설계도를 보듯 표지에 ‘책머리’ ‘표지보강재’ ‘책등’ ‘출판사 로고’ 등 명칭도 충실히 적었다. 풍성한 시각자료도 페이지를 술술 넘기게 만든다.
책 후반부에 실린 ‘콜로폰(Colophon)’도 매력 포인트다. 저자는 “책을 자연스럽게 마무리하려면 보통은 여기에 에필로그를 쓴다. … 그러나 인쇄술이 처음 선을 보인 초창기에는 독자가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콜로폰이었다”는 설명을 붙였다. 책 뒤편 한쪽 자리 면을 뜻하는 콜로폰은 과거 인쇄업자가 회사 이름, 회사 문장(紋章), 발행 장소 등을 촘촘히 기록한 페이지다.
“책은 산 성분이 없는 중성지에 인쇄, 636×900밀리미터 규격의 종이, 1제곱미터당 90그램의 무게, 경기 고양시 인쇄소에서 생산, SM신신명조체, 10.3포인트 … 포켓북 스타일의 8절판으로 누구나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가격을 책정했다.”
구구절절 이어지는 ‘책의 책’에 관한 설명은 요새 말로 ‘TMI(Too Much Information·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정보)’에 가까우나, 읽는 내내 미소를 머금게 한다. 갓 태어난 아이의 출생기록 차트를 보듯 뜨거운 생명력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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