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위의 리더들[오늘과 내일/박용]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9월 21일 03시 00분


깜빡이는 복합 위기 신호들… 국가 리더들 위기관리 역량 있나

박용 뉴욕 특파원
박용 뉴욕 특파원
최근 미국 안팎에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처음’ 같은 수식어가 붙은 이례적 대형 사건이 줄을 이었다. 14일 사우디아라비아 핵심 석유시설에 대한 무인기(드론) 공격 이틀 만인 16일 국제 유가는 2008년 12월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수십 대의 드론 공격으로 세계 원유 생산량의 약 5%가 하루아침에 증발하리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게다가 미중 무역전쟁, 홍콩 반중 시위,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등 곳곳이 지뢰밭이다.

과거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며 각국 갈등에 개입하던 미국 대통령이 “우리는 세계 최대 에너지 생산국이다. 중동산 원유 및 가스가 필요하지 않다”며 군사 개입을 주저하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비용 문제를 이유로 중동 개입 및 해외 주둔 미군에 질색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우리가 중동을 위한 경찰이 됐다.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노골적 불만도 드러냈다. ‘미국 없는 세상’의 낯선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미국 본토도 사정은 비슷하다. 미 최대 자동차회사 제너럴모터스(GM)는 2007년 이후 12년 만에 파업에 돌입했다. 금융위기 극복 이후 상승세를 탔던 세계 자동차 시장이 고꾸라지면서 노사 갈등이 재연됐다. GM 노조는 시장 둔화와 전기차 등의 기술 변화에 살아남기 위해 미국 내 4곳의 공장 폐쇄를 예고했다.

GM의 파업은 세계 제조업 둔화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자동차산업 동향을 보여주는 8월 세계 자동차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2009년 이후 10년 만에 가장 낮았다. 국제금융센터는 “세계 제조업 경기가 과거 주요 위기 국면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위축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나마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는 세계 서비스업 경기마저 위축세로 돌아서면 경기 침체 논란이 고조되고 금융시장의 불안감이 더 높아질 수 있다는 경고다.

7월 10년 7개월 만에 기준금리를 내렸던 미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18일 연속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경기 침체를 막기 위한 일종의 두 번째 ‘예방주사’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마이너스(―) 금리’를 거론하며 연준에 추가 금리인하를 거세게 압박하고 있다. 미국의 마이너스 금리는 아무도 가 보지 못한 길이다. 연준 안팎에서는 경기 침체를 선제적으로 막기 위해 기준금리 수준을 너무 낮춰 놓으면 진짜 침체가 닥쳤을 때 위기를 진화할 중앙은행의 ‘실탄’이 부족해진다는 우려가 나온다. 11년 전 금융위기 당시 연준은 5%대이던 금리를 제로(0) 수준까지 끌어내렸다. 통화정책 여력이 충분했다는 뜻이다. 현 기준금리는 1.75∼2.00% 수준이어서 금융위기 때만큼의 인하 여력이 없다.

여기저기서 깜빡이는 위기 신호가 반드시 세계 경기 침체 및 지정학적 위기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그렇다 해도 각국 지도자들이 경제, 안보, 지정학적 위기가 얽히고설킨 ‘복합 위기’의 그림자 속에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헤쳐 나가야 함은 분명해 보인다.

한국은 미국에 대한 안보 의존도가 높고, 중동산 원유 수입도 중국 일본 다음으로 많다. 자유무역으로 성장한 소규모 개방 경제 구조를 지녀 다른 나라가 ‘감기’에 걸릴 때 ‘폐렴’에 걸릴 가능성도 높다. 위기 요인을 면밀히 분석하고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국가 위기관리 시스템이 어느 나라보다 탄탄해야 한다.

한 몸처럼 움직이면서 대책을 준비하기에도 바쁜 와중에 영어로 말다툼을 하고 볼썽사나운 기싸움이나 벌이는 국내 외교 안보 리더들을 어떻게 믿고 따를까. 국민들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로 안내하려면 리더들부터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어야 한다.
 
박용 뉴욕 특파원 parky@donga.com
#석유시설 공격#미중 무역전쟁#홍콩 반중 시위#브렉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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